[선비들의 사랑이야기 .9] 만중운산에 어느 임 오리마는- 서경덕과 황진이(下)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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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0   |  발행일 2016-10-20 제22면   |  수정 2016-10-20
밤비에 새입나거든
“추풍에 지는 낙엽소리, 행여 임인가” 간절한 그리움은 詩를 낳고…
20161020
남명 조식이 만년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던 산천재(경남 산청). 서경덕은 제자인 토정 이지함과 지리산 유람을 왔다가 조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 것으로 전한다.

이런 이야기도 회자된다.

어느 날 대제학과 판서를 지낸 소세양(1486~1562)이 황진이가 대단히 매력적인 기생이라는 소문을 듣고 “나는 한 달간 황진이와 같이 살아도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을 것이다. 단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장담했다.

이 소문을 들은 황진이가 의도적으로 소세양에 접근했고, 소세양은 그녀를 보자 바로 빠져 버렸다. 그리고 만난 지 한 달이 지나 이별하는 날이 왔다. 이때 황진이가 작별을 기념하며 한시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을 지어주었다.

‘달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月下梧桐盡)/ 서리 속 들국화 노랗게 피었구나(霜中野菊黃)/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樓高天一尺)/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人醉酒千觴)/ 흐르는 물은 거문고처럼 맑고(流水和琴冷)/ 매화는 피리소리에 젖어 향기롭기만 하네(梅花入笛香)/ 내일 아침 임 보내고 나면(明朝相別後)/ 사무치는 정 푸른 물결처럼 끝 없으리(情與碧波長)’

이 시를 본 소세양은 “내가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라고 말하며 처음의 호언장담을 꺾고 한참 더 머물렀다. 황진이는 당대의 명창인 선전관 이사종(1543~1634)과는 6년간을 약정하고 함께 살기도 했다.


명기 황진이
여러 인사와 자유분방한 사랑
서경덕에만 존경·흠모로 일관
선생 사후엔 세속의 인연 끊어

화담 서경덕
개성 출신의 조선 중기 대학자
理보다 氣 중시 主氣論 선구자
송악산 화담 초막서 학문 열중



이처럼 여러 인사와 자유분방한 사랑을 나눴지만, 서경덕에 대해서는 오직 존경하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일관했다. 서경덕을 사모한 황진이는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서경덕의 거처에 가서 즐기다 돌아가곤 했다. 황진이는 “지족선사가 10년을 면벽(面壁)하며 수양했으나 내게 지조가 꺾였지.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라 할 만하지”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운 마음 시로 달래며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도 이런 황진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다음 시조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임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그인가 하노라’

황진이가 서경덕을 몹시 연모하며 애태웠음은 물론이다. 황진이의 아래 시는 서경덕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임을 언제 속였기에/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가을 바람에 지는 낙엽 소리를 임이 오는 소리인가 여긴다는 마음을 표현, 임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래 시조는 서경덕이 별세한 후 지은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인걸은 서경덕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노메라’

1546년 서경덕이 별세한 후 황진이는 서경덕을 떠올리며 그의 발자취가 남은 금강산, 속리산 등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결국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 이 세상을 떠났다.

서경덕과 황진이의 관계에 대해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랑(황진이)은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했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거처에 가서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면서 즐긴 다음에 떠나갔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선사가 30년을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다. 죽을 무렵에 집안사람에게 ‘출상할 때 제발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고 말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황진이는 화담 서경덕이 처사(處士)로서 행실이 고상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학문이 정수(精髓)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를 시험해보려고 허리에 실띠를 묶고 ‘대학(大學)’을 옆에 끼고 찾아가 절을 한 뒤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예기(禮記)에 남자는 가죽띠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맨다고 했습니다. 저도 학문에 뜻을 두어 실띠를 두르고 왔습니다.’ 화담은 웃으며 받아들여 가르쳤다. 진이는 밤을 틈타 곁에서 친근하게 굴면서 마등(魔登)이 아난(阿難)을 어루만진 것처럼 음란한 자태로 유혹했다. 여러 날 그렇게 했다. 하지만 화담은 끝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후 평소 황진이를 그리워하며 동경하던 백호(白湖) 임제(1549~87)가 1583년 평안도 도사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송도의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술잔을 올린 뒤 시조 한 수를 지어 애도하기도 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서경덕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서경덕(1489~1546)은 이(理)보다 기(氣)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완성해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개성 출신이며, 호는 화담(花潭)이다. 1502년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日)·월(月) 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 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1506년 ‘대학’의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조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는 날마다 힘써 탐구했다. 특히 20세 때는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자주 잊은 채 사색에만 잠기는 습관이 생겨 3년을 그렇게 지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일화들은 서경덕이 사색과 궁리를 통해 직접 깨닫는 데에 힘을 쏟았음을 말해준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34세가 되던 해 그는 남쪽의 여러 곳을 유람하기 위해 길을 떠났고, 제자인 토정 이지함과 함께 지리산을 찾아갔다가 남명(南冥) 조식을 만나기도 했다.

1531년 4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나, 성균관에서 수습 도중 개성으로 돌아와 송악산 자락의 화담 옆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 서경덕의 호인 화담은 바로 이곳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함(挽人)’ 중 일부이다.

‘만물은 모두 잠시 머무는 것 같아서(萬物皆如寄)/ 한 기운 속에서 떴다 가라앉을 뿐이네(浮沈一氣中)/ 구름 생기는 것을 보라 흔적이 있던가(雲生看有跡)/ 얼음 녹은 뒤를 보라 자취도 없다네(氷解覓無)/ 낮이면 밝다가 밤이면 어두워지니(晝夜明還暗)/ 으뜸과 곧음이 시작되고 끝나고 하네(元貞始復終)/ 진실로 이런 이치를 훤히 알게 되면(苟明於此理)/ 장자처럼 항아리 두드리며 그대를 보내리(鼓缶送吾公)’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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