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불순한 개헌론자들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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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6   |  발행일 2016-10-26 제31면   |  수정 2016-10-26
[박재일 칼럼] 불순한 개헌론자들

“왜 데모를 해, 전두환 물러가라고? 그런다고 해결되겠나.” 막걸리집 주인은 데모하는 청년들이 못마땅했다. 그러자 청년 중 누군가가 다시 답했다. “핵심은 이겁니다.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하자는 겁니다. 이게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진보하는 첩경입니다.” 그러자 술집 주인이 말했다. “아, 그건 나도 동의한다. 잘해봐라.”

이른바 ‘87 체제’로 지칭되는 현행 6공화국 헌법은 이렇게 탄생됐다. 1986년과 87년 사이의 시민투쟁은 민주화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 요체는 한편 대통령 직선제였다. 우리 손으로 우리 대통령을 뽑겠다는 외침이었다. 그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1조)는 명제의 실천이기도 했다. 시대정신이었다.

사실 현행 6공화국 헌법은 크게 흠결이 없다. 광복 이후 줄기차게 이뤄져온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꼭짓점에서 나온 산물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정치, 경제, 입법의 적절한 장치들을 잘 선택해 우리 역사 위에 얹으면 가능한 것이 헌법이었다.

6공화국 헌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미봉책을 담고 있다. 하나는 대통령제에 대한 보다 ‘정치(精緻)한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자치의 실천을 방기했다는 점이다.

대통령제의 어정쩡한 장치는 바로 5년 단임제(70조)다. 이건 대통령 연임과 독재의 트라우마에서 나온 고육지책이다. 당장 정치공학적 문제가 있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의 4년 임기와 수치상 맞지 않다. 20년마다 한 번씩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가 겹치는가 하면, 어떤 때는 매년 선거를 치른다. 선거주기와 정치일정의 예측 가능성이 크게 떨어진다. 합리적이라면 4년 중임제가 답이다.

지방자치 부분도 마찬가지다. 다른 모든 부분은 서구 민주주의의 잘된 점들을 잘 추려서 갖춰놓았지만 유독 이 부분만 꼬리를 내렸다. 현행 헌법의 지방자치 조항은 딱 2개(제117조와 118조)다. 알맹이도 없다. ‘지방자치와 지방의회에 대해서는 법률로 정한다’며 미뤄버렸다. 무시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최순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개헌론을 꺼냈다. 개헌에 대해서는 그동안 숱한 주장이 난무했다. 기본권을 손질해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대통령제를 폐기하고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를 도입하자는 정파들까지 출현했다. 나름대로 일리는 있지만, 한편 공허하다. 미안하지만 민주적 헌법 질서는 서구의 산물이다. 기본권만 하더라도 존 로커에서부터 미국의 건국론자들이 설파하고 고안한 명제들이다. 이걸 우리가 새삼 재검토하겠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고, 물리적으로 엄청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다.

일부는 불순한 저의마저 엿보인다.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만 해도 우리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이미 30년 전 군부독재의 연장선에서 이원집정부제 발상이 나왔고, 내각제의 경우 무슨 파동으로 두세 차례 국민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갖게 했다. 툭하면 정치 퇴물들이 주장하는 것이 내각제가 됐다.

개헌을 한다면 최소한의 공약수를 도출하고,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 그 공약수는 또한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헌법은 법률이나 시행령처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법이 아니다. 미국이 왜 수정헌법 형태를 고수하는지 알아야 한다.

대통령이 발의하든 국회가 논의하든 개헌을 추진한다면 그건 한두 가지의 외과적 수술, 이른바 ‘원포인트 혹은 투포인트 개헌’으로 절제해야 한다. 대통령 임기를 바꾸고, 시대적 소명을 담아 지방자치 정신을 보다 명료히 헌법에 구현하는 것이 작금의 정답이다. 자꾸 많은 것을 담으려면 끝이 없고, 부질없는 논쟁만 쌓일 뿐이다. 정치는 상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개헌의 장(場)이 퇴물 정치인들이나 한물간 학자들의 놀이터가 돼서는 안 된다. 헌법 규정이 없어서 우리의 정치와 경제가 후퇴하는 것은 아니다. 글로 담는 것을 넘어, 운용과 실천의 정치문화가 더 중요하다.

편집국 부국장 겸 정치부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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