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작은 결혼식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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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8   |  발행일 2016-10-28 제23면   |  수정 2016-10-28
[조정래 칼럼] 작은 결혼식

퇴직하는 순간 전화번호부터 바꾸겠다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왜냐고? 세금고지처럼 몰려올 청첩이 무서워서란다. 그렇게 번호 변경까지 했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보지 못했으니 웃자고 한 소리일 터이다. 하지만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넘겨버리기에는 가볍지 않은 진실을 담고 있다. 실제 모든 청첩을 매몰차게 외면하는, 시쳇말로 잠수 타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호모 론리쿠스’도 있다. ‘시국선언’이 나오는 마당에 무슨 한가한 소리를 하냐고 핀잔을 듣기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청첩이 쇄도할 이 가을에 꼭 한 번 부의금 ‘실태선언’을 하고 가야 직성이 풀리겠다.

현직 샐러리맨도 어렵기는 오십보백보. 손에서 입으로 직행하기 바쁜 뻔한 수입에서 부조금은 할인과 유예를 허용하지 않는 고정비용이다. 더구나 낭비벽 등으로 인해 통장을 뺏겼거나 자발적으로 반납한 이 땅의 수많은 찌질남들은 빠듯한 용돈에서 부조금을 해결해야 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하여, 일일이 아내에게 손을 벌릴 수 없으니 비자금을 조성해야 된다는데, 뭐 너도 알고 나도 아는 허여멀건 국에 꼬불칠 건덕지라도 있어야지, 이건 숫제 그림의 떡 아닌가. 남자라면 수천만원 정도 비자금을 관리하는 게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말하던 이가 부러울 뿐이다. 그리하여 ‘미필적 고의’에 의해 흘려보낸 부조금 탓에 관계는 서먹서먹해지고, 오늘도 나는 ‘반의사 현실부합죄’를 범하곤 한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의식은 법으로 규제되기 어렵고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 우리의 전통 관혼상제는 외려 미풍양속으로 계승·장려돼야 할 문화다. 그런데 한때 허례허식을 줄이고 낭비를 억제한다는 명목으로 국가가 개입해 가정의례준칙을 만들고, 이를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 등으로 제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법률의 많은 조항이 위헌 판결이나 현실 불부합으로 사문화되면서 법의 존재마저 있으나 마나 한 채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져 갔다. 과거에 비해 대폭 간소화된 우리 가정의례는 실상 법의 적용과 그 효용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의식의 변화에 기인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장례는 절차와 규모의 간소화를 거듭하고 있고, 제사는 더 이상의 간편화를 우려해야 할 정도로 작아져 왔다. 하지만 결혼은 어찌 된 일인지 거꾸로 역행하며 허례허식의 진화적 돌연변이를 보여주고 있다. 언론에서 아무리 ‘작은 결혼식’을 주창하고,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의 약속을 잇따라 내놓아도 크고 화려한 결혼식은 요지부동이다. 결혼 적령기 남녀들이 결혼을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집을 마련할 경제적 여유 부존재 때문이고, 그래서 집 장만할 돈부터 버느라 결혼할 시기를 놓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다. 통상 집 마련 책임을 떠안는 아들 둘 있으면 집 두 채 있어야 장가보낼 수 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 현실 또한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니, 스스로의 사고와 행동을 젊은이 탓으로 돌리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집과 차 등 거품이 잔뜩 낀 일종의 호화 혼수가 우리의 결혼문화를 주도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부조 관행 역시 많은 의식의 손질이 필요하다. 김영란법이 허여한 ‘3·5·10(식사·선물·부조 한도액)’ 가이드라인이 부조 한도액을 10만원으로 상향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다며 중앙일보 이훈범 논설위원은 차라리 ‘10·5·3’으로 하는 게 나을 뻔했다고 제언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경조사비는 어떤 식으로든 줄이고 거품을 빼야 한다. 해서 정승집 말이 죽으면 집 앞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문간이 휑하다는 염량세태의 부끄러움, 그 고리를 언젠가는 끊어야 한다.

의례의 허식은 법이 아니라 의식개혁으로 정제될 수밖에 없다. 부조는 과거 집에서 키우던 닭 한 마리, 계란 한 꾸러미, 보리쌀 두어 되 등을 망태나 보따리에 싸 들고 가 주고받았던 감동과 십시일반의 전통을 잃었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단출한 결혼식과 부조 관행이 새로이 자리 잡았으면 하는 게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게다. 문제는 누가 먼저 주도하느냔데, 스스로 시나브로 조금씩 작게 하는 실천이 느리지만 빠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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