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북 김제 벽골제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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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8   |  발행일 2016-10-28 제36면   |  수정 2016-10-28
32만 민초의 ‘뼛골’로 쌓은 백제의 물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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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 제방 위에서 남쪽을 본다. 오른쪽에 수문의 돌기둥이 솟아 있고 왼쪽의 갈대밭 아래는 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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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의 수문인 장생거. 1980년에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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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량면 용골에서 본 벽골제. 일제 때 둑의 한가운데를 파서 수로를 만들면서 둑은 둘로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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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에 설치되어 있는 쌍룡 조형물. 조연벽 장군의 설화가 담겨 있다.

‘징게맹개 외배미들’. 어린아이 노랫말 같은 이것이 ‘김제만경 너른 들’이라는 뜻이란다. 북쪽의 만경강과 남쪽의 동진강 사이에 김만평야를 망망히 펼쳐 놓은 김제. 삼한시대에는 ‘볏비리국’, 백제 때는 ‘볏골군’이었으니 김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벼 고을이었다. 벼 고을 ‘볏골’을 한자로 적은 것이 ‘벽골’이라 한다. 그러니 벽골제는 볏골의 제방인가. 아! 푸를 벽(碧)에 뼈 골(骨)이라, 황금빛 들과 푸른 저수지를 척추처럼 가르는 장한 모습을 상상했는데.

330년 축조된 우리나라 저수지의 효시
전체둘레 44㎞·제방 3.3㎞에 5개 수문
일제 때 간선 수로로 개조…제방 양분
규모 줄어 수문 장생거·경장거만 남아

일꾼 짚신 흙 터니 산 이뤘단 ‘신털뫼’
500명 들어설 논으로 인원 센 ‘되배미’
보수 때 많은 인부 동원…지명에 남아
벽골제 맞은편엔 조정래 아리랑문학관


◆고대의 거대산업구조물, 벽골제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김제만경평야의 너른 들을 적시던 삼한 시대의 저수지다. 백제 비류왕 27년인 330년에 축조된 것으로 우리나라 수리 시설 중 가장 오래 되었다. 물을 가두는 제방만 3.3㎞, 전체 둘레는 44㎞를 넘었으며 수여거(水餘渠), 장생거(長生渠), 중심거(中心渠), 경장거(經藏渠), 유통거(流通渠) 등 다섯 개의 수문이 있었다. 수문을 통해 흘러나간 물은 김만평야는 물론 정읍, 부안, 신태인까지 그 물길이 미쳤다 한다. 현재는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에 걸쳐 2.5㎞에 이르는 제방과, 장생거와 경장거 두 개의 수문만이 남아 있다. 거대했던 저수지는 이제 작은 연못이다.

지평선처럼 가로놓인 벽골제 앞에 장생거 돌기둥이 무인석처럼 서있다. 수문의 너비는 4.2m, 돌기둥의 높이는 5.5m다. 수문의 외부에는 호안석(護岸石)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 벽골제 제방을 쌓는 데만 약 32만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된다. 수문 및 하천 공사 등을 헤아리면 공사 인원은 훨씬 증가한다. 전통농경사회에서 치수(治水)는 식량 생산에 절대적 요소였다. 이러한 거대 산업시설은 왕의 힘과 떼어놓을 수 없다.

당시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밀려와 제방을 쌓는 일이 정말 어려웠다고 한다. 조수는 멈춤이 없고 그때마다 힘껏 쌓아놓은 제방을 망쳐놓곤 했다. 벽골제에는 푸른 뼈를 갈아 흙과 섞어 쌓음으로써 완공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벽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말뼈가 푸르다는 상세까지 부연되어 전해오니 누군가는 이 전설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완공된 이후 벽골제는 통일 신라와 고려를 거쳐 여러번 보수되었고, 조선 태종 때인 1415년에는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다. 그때 세운 중수비가 장생거 근처에 있다. 거기에는 ‘군의 남쪽 15리쯤 큰 둑이 있는데, 그 이름은 벽골(碧骨)이다. 이는 옛 사람이 김제(金堤)의 옛 이름을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제의 옛 이름은 볏골, 벽골제는 뼛가루의 힘이 아닌 사람의 힘이 이룬 것이라는 게 옳다.

◆신발의 흙을 털어 산을 이루다

제방에 올라선다. 제방은 장하고 옹골차게 남쪽으로 뻗어나간다. 동쪽은 수로다. 1925년 일제는 섬진강댐인 옥정호를 만들어 물길을 열면서 벽골제를 간선 수로로 개조했다. 제방은 양분되었고 저수지는 논이 되었다. 저수지를 가로질러 다리가 놓여 있고 그 너머로 연못 규모가 된 저수지가 보인다. 그러나 부량면 일대에는 벽골제의 최대 규모를 기억하는 이름들이 남아 있다. ‘되배미’라는 논과 ‘신털뫼(신털미산)’라는 산이 대표적이다.

조선 태종 때의 보수 공사에는 전국의 백성들이 일꾼으로 동원되었다. 매일의 첫째 일은 인부들을 점검해 작업 배치를 하는 것이었다. 인부들의 수는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한번에 500명씩 들어설 수 있는 논을 만들고 그것을 ‘되배미’라 했다. 500평의 논에 지게를 짊어진 장정이 들어서면 꼭 500명이었다 한다. 사람의 수를 ‘되’로 헤아린 것이다.

하루하루의 노역이 끝나면 인부들은 짚신에 엉겨 붙은 흙을 털거나 해져버린 짚신을 버렸다. 흙과 짚신은 쌓이고 쌓였고 나무 몇 그루 있던 평지는 이윽고 산이 되었으니, 그것이 신털뫼다. 한자로는 초혜산(草鞋山)이라 한다. 제방에 서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은 보이지 않는다. 사진으로 확인한 신털뫼는 작은 언덕에 소나무들이 올라선 모습으로 간신히 산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경상도 사람의 눈에는 사실 작은 언덕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평야 사람들에게 그것은 산이었다. 되배미는 광복 이후 집터나 밭이 되었지만 논 흔적은 아직 남아있다고 한다.

◆벽골제 관광단지

장생거를 중심으로 한 벽골제 일대는 지금 관광단지다. 솟을대문과 낮은 돌담으로 구획된 내부에는 전통숙박시설,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명인학당, 먹거리가 풍성한 벽골 장터, 다양한 공방 등이 자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 외에도 농경사 체험관, 민속유물 전시관 등이 주변을 구성한다. 벽골제 제방 아래에는 두 마리 용이 맞붙어 있다. 철사로 뼈대를 만들고 대나무로 살을 붙인 조형물이다. 여기에는 고려 시대에 벽골제를 지키는 백룡을 도와 청룡(혹은 흑룡)을 물리쳤다는 조연벽 장군 설화가 담겨 있다. 단야라는 낭자가 스스로 청룡의 제물이 되어 벽골제 보수공사를 무사히 마무리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가을마다 지평선 축제가 열린다.

솟을대문 맞은편 큰 길을 건너면 농업생명체험관,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 등이 자리한다. 조정래는 소설 아리랑에서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고 했다. 지금 이곳에서 지평선을 보기는 좀 힘들다. 농업생명체험관의 탑이나 농경사 체험관의 전망대에서는 보일지도 모르겠다.

김제라는 이름은 신라 때 생겼다. 신라 때부터 사금이 채취되었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추수가 끝나면 사금을 찾는 포클레인이 밤새 불야성을 이루어 논을 파헤쳤다 한다. 그러나 노랗게 물든 황금 들녘을 보고 지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그 선명한 황금빛 지평을 보기 위해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다. 단지를 조금 벗어나자, 들이 펼쳐졌다. 황금빛이었다. 벽골제도, 벽골제 행도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88고속도로 함양 분기점에서 35번 대전 통영 고속도로 대전방향으로 간다. 장수 분기점에서 20번 익산 장수간 고속도로 익산 방향으로 간 후 다시 익산 분기점에서 25번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남하해 김제IC로 나간다. 김제시에서 신태인, 정읍 방향 29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왼쪽에 벽골제 관광단지가 보인다. 입장료와 주차료 모두 무료다. 월요일은 휴관이지만 전시관 외에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단지 밖으로 연장되는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약 2.1㎞ 거리에 또 하나의 수문인 경장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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