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피플] 포항 출신 배우 김호창

  • 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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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8   |  발행일 2016-10-28 제43면   |  수정 2016-10-28
“‘푸른거탑’ 사이코 상병役, 내겐 황금 동아줄”
20161028

84년생 30대 초반의 배우 김호창. 이름만 들으면 “누구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르지만 실물을 보면 “아! 그 사람”이라고 번뜩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추억의 군대 에피소드를 세밀한 심리묘사로 다뤄낸 시추에이션 드라마 tvN ‘푸른거탑’에서 건들면 터질 것 같은 ‘사이코 상병’으로 대중에게 기억되고 있다.

‘푸른거탑’은 MBC ‘일밤’의 코너인 ‘진짜 사나이’로 이어지는 ‘군대 예능’ 열풍의 진원지로 통한다. 2013년 전후로 케이블 방송가의 화제작으로 떠오르며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시청층까지 단번에 사로잡았다. ‘푸른거탑’이 예능적 요소가 강한 프로그램이다 보니 간혹 김호창을 개그맨으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일찌감치 재능과 실력을 인정받은 연기자다.

포항에서 초·중·고교를 나온 그는 홀로 아들을 키우느라 고생한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건실한 청년’이다. SBS 아침드라마 ‘사랑이 오네요’와 뮤지컬 ‘기억전달자’ 출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를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매일 2시간 자고 포항∼대구 오가며 연기 공부

평소 드라마나 영화에 전혀 관심 없었던 그가 연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영화 ‘쉬리’의 최민식을 보는 순간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을 느꼈다.

“밖에서 친구를 기다리다 시간을 때우려고 우연히 극장에 갔는데 그때 본 영화가 ‘쉬리’였어요. 최민식 선배님의 연기를 보고 ‘와, 멋있다. 나도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우가 되면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데, 그러면 어머니 호강시켜 드릴 수 있겠다 싶었죠.”


밋밋하던 캐릭터 분석…맛깔나게 살려
인기와 함께 군대 예능열풍 주도 한몫
개그맨으로 보는 이 많지만 만능 연기자

고2때 영화‘쉬리’최민식 보고 배우 꿈
2시간씩 자며 2년간 대구 오가며 공부
최연소 국립극단 단원·공채탤런트 이력

유독 기획사 운 없어 서럽고 배고픈 생활
‘기억전달자’로 7년 만에 뮤지컬 무대
“모든 장르서 믿고 보는 연기자가 될 것”



그러나 연기자가 되는 방법을 찾는 데는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그는 “당시 포항에는 연기를 배울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대구로 가서 극단을 함께 운영하던 연기 학원에 등록했다”고 말했다. 극단 막내들이 해야 하는 청소 역시 그의 몫이었다.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포항과 대구를 오가며 겪은 고생담은 꿈을 향한 그의 불굴의 투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매일 오후 4시 정규 수업이 끝나자마자 통일호 열차를 타고 2시간 걸려 대구로 갔습니다. 당시 기차비가 2천원이었어요. 오후 7시부터 밤 12시까지 연기 연습을 한 뒤 오전 1시에 출발하는 막차를 타고 포항에 도착하면 오전 3시였어요. 집에서 씻고 4시쯤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러곤 오전 7시30분에 스쿨버스를 타야 해서 그 전에 일어났죠. 결국 잠은 2시간밖에 못잤어요. 그런 생활을 2년간 했습니다. 어머니가 힘들 게 번 돈을 허투루 쓸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 끈질긴 노력 끝에 그는 수많은 배우들을 배출한 단국대 연극영화학과 1학기 수시모집에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실기 전형의 비중이 높은 경쟁에서 당당히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최연소 국립극단 단원에서 무명 배우로

군 제대 후 그는 2007년 23세의 나이로 1천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최연소 국립극단 단원이 됐다. 안정적으로 연기할 수 있었던 그는 3년 만에 극단을 나와 뮤지컬 무대에 올랐다.

“국립극단에서는 월급을 받았고, 해외 공연도 자주 다녔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린 나이에 공무원이 된 거나 다름 없었죠. 그런데 어느날 일본 공연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서희승 선생님이 “이제 그만 극단에서 나가라. 고인 물이 되지 말고 더 큰 물에서 마음껏 놀아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분의 말씀이 큰 자극이 됐습니다. 그래서 극단을 관두고 무작정 대학로로 가 뮤지컬 배우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엔 아침에 편의점 아르바이트하고 낮에는 옷을 멋있게 차려입고 드라마 제작사·영화사에 프로필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면 새벽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택배 일을 했어요.”

열심히 했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최연소 국립극단 단원이라는 타이틀은 밖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실상은 그저 무명의 가난한 배우일 뿐이었다. 그러다 그는 6년 만에 부활한 SBS 11기 공채 탤런트 시험에 응시해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영화 ‘아저씨’와 드라마 ‘시크릿 가든’으로 이름이 알려진 김성오가 그의 동기다.

힘든 과정을 통과해 공채 탤런트로 이름을 올렸지만 막상 그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처음엔 동기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지 못했어요. 단역조차 맡기 힘들었죠. 연기를 너무 연극적으로 한다는 지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연기에 힘을 빼려고 부단히 노력했죠. 그러다 처음으로 비중있는 배역을 갖게 된 작품이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였어요.”

사실 그를 알아보는 시청자 중에는 일명 ‘홍자매’로 불리는 홍정은·홍미란 작가가 대본을 쓰고 이승기와 신민아가 주연으로 출연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서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도 있다. 그는 이승기의 친구 역할로 등장해 신인 연기자로서는 꽤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붙잡은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 무렵 들어간 기획사에서는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하며 쭉쭉 치고 올라가야 할 그를 제대로 관리해주지 못했다. 또 새로 들어간 기획사는 투자가 끊겨 갑자기 문을 닫기까지 했다.

“다시 단역을 맡기 시작했어요. 오디션을 봐서 주요 배역에 캐스팅이 돼도 촬영 일주일 만에, 혹은 촬영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잘리는 거예요. 힘있는 기획사나 투자회사들의 입김에 배우가 교체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배우를 그만둬야겠다는 마음까지 먹게 됐어요. 내가 맡기로 했던 역할에 대신 들어간 배우가 그해 신인상을 타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아팠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를 구해준 작품 ‘푸른거탑’

거듭되는 불운에 연기를 포기하려는 마음까지 먹었던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불어넣어준 고마운 작품이 나타났다. 그게 바로 ‘푸른거탑’이다.

그는 “‘푸른거탑’ 출연 제의가 왔을 때, 배우를 관두려고 하니까 이렇게 나를 찾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렇게 잘 될 줄 몰랐다. 이후 ‘진짜 사나이’ 같은 프로그램도 생겨나는 등 ‘푸른거탑’은 군대 열풍을 일으킨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다소 밋밋한 상병 캐릭터였지만 그가 직접 캐릭터 분석을 통해 ‘사이코 상병’으로 변화시켰다. 그게 그야말로 ‘빵’ 터졌다. ‘푸른거탑’의 인기는 아직도 여전한 듯했다. 특히 남성 시청자들의 반응이 남다르다. 이날도 인터뷰가 진행된 카페의 남자 직원이 팬임을 자처하며 그에게 반가움을 표시할 정도였다.

잘 될 때가 있으면 안 될 때도 있는 법. 그에게 부침(浮沈)은 계속됐다. 유난히 기획사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푸른거탑’의 성공과 함께 새로 들어간 기획사 역시 그에게 날개가 돼주지 못했다. 지금은 기획사에 소속되지 않은 채 홀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최근 ‘기억전달자’에서 근초고왕역을 맡아 7년 만에 다시 뮤지컬 무대에 올랐다. 선배 배우 조승우처럼 뮤지컬과 영화, 드라마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만능 연기자가 되는 게 그의 꿈이다.

“조승우 선배님이랑 대학을 같이 다녔습니다. 영화 ‘클래식’으로 선배님이 많이 알려졌을 때 그 모습이 정말 행복해보였어요. 영화도 찍고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컬 무대에도 서는 걸 보니 저도 선배님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늘 선배님을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봤습니다.”

김호창은 “‘저 배우가 나오면 믿고 본다’는 말을 듣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조진웅처럼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소화해내는 신뢰를 주는 연기자가 되는 게 목표다.

“고등학생 때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포항에서 너가 뭘 할 수 있겠냐’라고 했어요. 실제로 연기를 할 만한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죠. 맨땅에 헤딩하기나 다름 없었어요. 머리가 찢기고 얼굴에서 피가 나도 혼자서 약 바르고 재생밴드 붙여가며 그렇게 해왔던 것 같아요. 두드리니까 결국 문이 열리더라고요. 늘 겸손한 배우가 되겠습니다.”

글=김명은기자 drama@yeongnam.com
사진=박푸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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