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0] 외로운 영혼 세상 사람이 두렵네요- 최치원과 두 소녀(上)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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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03   |  발행일 2016-11-03 제22면   |  수정 2016-11-03
밤비에 새잎나거든
스무살 孤雲, 꿈에서 만난 두 소녀와 사랑 깨어서도 잊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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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난징시 가오춘현 이가촌(李家村) 부근에 있는 쌍녀분(雙女墳). 최치원과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 쌍녀분은 최근 난징시가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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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녀분 앞에 있는 쌍녀분비. 비석 뒷면에는 쌍녀와 최치원에 얽힌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당나라 현위로 재직하던 최치원
정혼 거부하다 죽은 두 소녀 무덤
안타까운 마음에 찾아가 애도

난징에 전하는 ‘쌍녀분’ 이야기
무덤 발견돼 전설이 아닌 사실로
유명 관광지 되어 한국인도 찾아


‘성명을 감춘다고 이상하게 생각 마세요(莫怪藏姓名)/ 외로운 영혼 세상 사람이 두렵네요(孤魂畏俗人)/ 마음속을 다 말하고 싶으니(欲將心事說)/ 잠시 서로 친할 수 있는지요(能許暫相親)’ 고운(孤雲) 최치원(857~?)이 중국 리쉐이(水)현 현위(縣尉)로 있을 때, 두 소녀가 묻힌 무덤의 기막힌 사연을 듣고 그 무덤을 찾아 시를 한 수 읊었다. 이 시는 최치원의 시에 감응해 꿈속 선녀로 나타난 무덤 속 소녀들이 답한 시다. 중국의 무덤 속 두 소녀와 최치원의 사랑 이야기다.

◆무덤·두 소녀와 사랑 나눈 최치원

876년 겨울, 약관의 나이 최치원은 당나라 정부에 의해 리쉐이현 현위(縣尉)에 임명됐다. 장쑤성 리쉐이현은 경치가 아름답고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이 리쉐이현에는 화산(花山)이라는 곳이 있었다. 모란으로 유명한 화산에 꽃이 피면 아름다운 경치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화산은 현재 장쑤성 가오춘(高淳)현에 속한다.

화산 서쪽에 쌍녀분(雙女墳)이라는 옛 무덤이 있다. 들판에 있는 이 무덤에는 소녀 두 명이 묻혀 있다. 장씨 성의 두 소녀는 아름다운 용모에 재기가 넘쳤지만 부모가 그들이 원하지 않는 상대와 정혼시키자 그것을 거부하다가 울분에 차 죽게 되었고, 이곳에 묻힌 것이다. 당나라 천보(天寶: 당 현종의 연호 중 하나로 742~756) 시절의 일이다.

리쉐이현 현위 최치원은 화산을 순찰하다가 화산 근처의 역참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두 소녀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홀로 무덤을 찾아 애도했다. 황폐해진 옛 무덤을 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시를 한 수 지어 애도한 것이다.

그날 밤 역관에서 최치원은 선녀 두 명이 나타난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극진히 대했다. 붉은 소매의 저고리를 입은 선녀와 자주색 치마를 입은 선녀였다. 그들이 최치원에게 자신들의 불행한 신세를 한탄하자 이를 딱하게 여긴 최치원은 그 자리에서 시를 지었고, 두 선녀도 시를 읊어 답했다.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두 선녀와 최치원은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고, 최치원은 두 선녀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아침에 깨어보니 꿈이었다. 최치원은 꿈이 실제처럼 생생한 데다 두 선녀에 대한 사모의 정도 깊어 ‘쌍녀분기(雙女墳記)’를 지었다.

이 이야기는 통일신라 후기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한문설화집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에 실려 있었는데, 조선 전기에 성임(1421~84)이 편찬한 이야기집 ‘태평통재(太平通載)’에 ‘최치원’이라는 이름으로 전재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남송 때의 ‘육조사적편류(六朝事迹編類)’에 ‘쌍녀분기(雙女墳記)’라는 이름으로 자세하게 기록됐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전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20세기 말 고고학적 발굴로 이 무덤이 발견돼 전설이 실제인 것으로 밝혀졌다. 최치원이 묘사한 쌍녀분 위치에서 완벽하게 보존된 당나라 고분이 발견됐고 당나라 때 문물이 출토된 것이다. 무덤 속에는 두 개의 묘실과 묘도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것은 두 여성의 묘를 합장했다는 설과 맞아떨어진다. 고증에 따르면 이 무덤은 지금으로부터 1천250여 년 전인 당나라 천보 연간의 것으로 드러났다. 각 분야 전문가들은 이것이 최치원이 말한 쌍녀분이라고 판단했다.

국경과 생사를 초월한, 현실과 꿈의 경계를 뛰어넘은 사랑 이야기가 서린 곳인 쌍녀분은 최근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한국 관광객도 종종 찾고 있다. 쌍녀분은 한적한 농촌 들판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지만, 부근 길 몇 군데에 한글을 병기한 안내 표지가 서 있어 도움을 준다.

최치원이 현위로 근무했던 리쉐이현은 지금 두 개의 현으로 나뉘어 있다. 난징 시내에 가까운 리쉐이현과 창저우(常州) 쪽에 가까운 가오춘(高淳)현 중 가오춘현이 당나라 최치원과 관련된 쌍녀분이 있던 곳이다. 난징시 인민정부는 쌍녀분 주변을 거칠게나마 정비한 후 2006년 6월 쌍녀분을 난징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공포하고 그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우리나라 왕릉의 봉분보다 훨씬 큰 봉분 위에는 온갖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봉분 입구로 보이는 석문(石門)도 퇴락한 채 방치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최치원 관련 유적이 있는 곳은 이곳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리쉐이현에 최치원 동상 등이 세워지고, 근처 양저우시에는 2007년 10월 ‘최치원기념관’이 건립되기도 했다. 최치원기념관에는 최치원상과 함께 최치원의 삶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를 정리해 전시하고 있다.

신라수이전(현재 전하지 않음)에 실려 있던 최치원과 쌍녀분 이야기다.

◆신라수이전에 실린 쌍녀분 이야기

최치원은 자(字)가 고운(孤雲)으로 12세에 서쪽 당나라에 가서 유학했다. 갑오년(874)에 학사(學士) 배찬(裵瓚)이 주관한 시험에서 단번에 괴과(魁科: 과거시험 장원 급제자)로 합격했다. 그 후 20세 되던 876년에는 율수현위를 제수받았다. 당시 현 남쪽에 있는 초현관(招賢館)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관(館) 앞의 언덕에는 오래된 무덤이 있어 쌍녀분(雙女墳)이라 했다. 고금의 명현(名賢)들이 유람하던 곳이었다. 최치원이 무덤 앞에 있는 석문(石門)에다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어느 집 두 아가씨 이 버려진 무덤에 깃들어/ 적막한 지하에서 몇 해나 봄을 원망했나/ 그 모습 허공을 맴돌고 시냇가는 달빛뿐이며/ 성도 이름도 묻기 어려운 무덤에는 먼지뿐이네/ 고운 그대들 그윽한 꿈에서 만날 수 있다면/ 나그네의 긴긴 밤 위로가 될 텐데/ 외로운 관사에서 비와 구름이 만난 듯/ 그대들과 더불어 낙신부(洛神賦)를 읊고 싶네’

쓰기를 마치고 초현관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달은 밝고 바람이 맑아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거니는데 홀연히 한 여인이 나타났다. 작약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의 그 여인은 손에 붉은 주머니를 쥐고 앞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팔낭자와 구낭자가 선생님께 말을 전하라면서 ‘아침에 특별히 어려운 걸음 하시고 거기다 좋은 글까지 주시어서 감사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낭자께서 각각 화답하신 글을 써 주시기에 이렇게 명령을 받들어 올립니다."

최치원이 그녀를 돌아보고 놀라며 어떤 낭자인지, 사는 곳이 어딘지 물었다. 여자가 말했다.

“아침에 덤불을 헤치고 돌을 쓸어내어 시를 쓰신 곳이 바로 두 낭자가 사는 곳입니다."

최치원이 그제야 깨닫고 첫째 주머니를 보니, 팔낭자가 최치원에게 화답한 시였다. 그 시다.

‘한을 품고 외로운 무덤에 기댄 영혼/ 붉은 뺨 버들눈썹 봄을 맞은 듯/ 학을 타고 삼신산을 어렵게 헤매다가/ 이 몸 헛되이 떨어져서 구천의 티끌 되었네요/ 살아서는 외간남자 부끄러워했지만/ 오늘은 낯모르는 이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답니다/ 시로 하신 말씀이 부끄럽게도 저의 마음 알아주시니/ 고개 늘여 기다리며 마음 아파합니다’

이어서 둘째 주머니를 보니 바로 구낭자의 것이었다. 그 시다.

‘오가는 이 누가 길가 무덤 돌아보겠습니까/ 난새 거울과 원앙 이불엔 먼지만 일어나네요/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고/ 꽃이 피고 지니 세상은 봄이랍니다/ 매양 진녀처럼 속세 떠나기를 원했고/ 임희(任姬)의 사랑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모셔서 양왕이 누렸던 운우의 꿈을 드리고자 하나/ 이 생각 저 생각에 마음만 상합니다’

또 뒤쪽에도 글이 쓰여 있었다.

‘성명을 감춘다고 이상하게 생각 마세요/ 외로운 영혼 세상 사람이 두렵네요/ 마음속을 다 말하고 싶으니/ 잠시 서로 친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지요’

글·사진=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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