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진실과 순실 사이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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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09   |  발행일 2016-11-09 제30면   |  수정 2016-11-09
20161109

朴 대통령의 공허한 가슴에
권력이 찾아온 것이 화근
더 이상 갈데없는 대통령이
평범한 일상으로 갈 수 있게
순실이 진실의 길을 갔으면


# 장면 하나

김민기와 조용필.

물과 기름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둘이 1997년쯤 서울 강남 방배동의 한 일식집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이 이벤트를 주선한 건 가요평론가 강헌씨였다. 어느 날 그가 조용필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형님,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정하는 가수가 누구세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조용필이 한 마디 내뱉는다. “있지, 딱 한 명이 있지. 김민기는 내가 인정한다.”

강헌은 흥분했다. 내심 이 세기의 미팅에서 누가 먼저 말을 할 건가, 또 어떤 대화가 오갈 것인지가 정말 궁금했다. 약속 당일, 조용필이 약속 장소에 일찌감치 나와 1년 후배인 김민기를 기다렸다. 둘은 2시간 동안 무슨 작정이나 한 듯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내리 소주 20병만 비웠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가게를 나온 둘은 자정 전에 귀가하는 것이 뭣했던지 근처 허름한 카페로 무심결에 들어갔다. 둘은 노래방기기가 비치된 한 룸으로 들어갔다. 침묵을 깨고 조용필이 갑자기 일어나 노래방기기 곁에 다가가 버튼을 누르고 어떤 노래를 불렀다. 놀랍게도 김민기의 ‘아침이슬’이었다. 김민기는 그 만남 이후 서울 동숭로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콘서트를 연 조용필을 위해 꽃다발을 사들고 갔다. 그게 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둘의 만남 못지않은 침묵의 만남이 히피 뮤지션 한대수에게도 있었다. 18세 때 성균관대 뒷산에서 ‘행복의 나라로’를 작사·작곡한 한대수. 1948년 3월 부산에서 유복하게 태어났다. 하지만 미국 유학을 떠났던 핵물리학자인 아버지(한창석)가 실종되는 바람에 그의 성장기도 얼어버린다. 뒤이어 어머니는 재가하고 7세부터는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세대를 설립한 할아버지(신학박사 한영교) 슬하에서 지낸다. 그가 16세 때 미국 FBI로부터 행방불명이던 아버지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이미 다른 살림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뉴욕 근처 롱아일랜드에 살고 있었는데 한대수 못지않게 자유주의자였다. 한대수와 아버지가 만났을 때 부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단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담배 피울 줄 아느냐”고 물었고, 한대수는 “예”라고 무심하게 대답한 게 대화의 전부였다. 어색한 침묵의 공간에 부자가 피워올린 맞담배 연기만이 파고들었다.

# 장면 둘

한 장의 사진이 생각났다.

2013년 여름, 박근혜 대통령이 나뭇가지로 휴양지인 경남 거제시 장목면 저도(猪島) 해변 백사장에 ‘저도의 추억’을 적고 있는 모습이다. 앞가슴뼈가 드러난 감청색 블라우스에 월남치마 같은 롱스커트, 발등이 드러난 샌들 차림이었다. 성심여고 1학년 때인 1967년 7월 박정희 대통령 등 가족과 함께 바닷가로 휴가를 떠나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었던 바로 거기다. 해말쑥한 여대생 같았다. 권력을 잠시 내려놓으면 그 누구나 외로운 존재라는 걸 암시하는 사진이었다.

갑자기 갈 데까지 간 박 대통령의 ‘무속적 침묵’을 김·조·한의 침묵라인에 살며시 올려주고 싶었다. 김민기보다 한 해 뒤인 52년에 태어난 박 대통령. 셋과 비슷한 연배로, 모르긴 해도 ‘아침이슬’ 등 아버지에 의해 금지된 이들의 노래를 서강대 시절 많이 흥얼거렸다.

그녀의 공허한 가슴에 예술·사랑 같은 게 아니라 ‘순실(최순실)발 권력욕’이 찾아왔다는 게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부모가 모두 비운에 간 70년대의 그 공허하고 비통한 가슴에 순실 대신 노래가 들어와 마지막 황손 이석처럼 ‘가수 박근혜’라도 됐다면 대통령이 된 것보다 덜 행복했을까.

그녀는 순실 엄마의 팔순 잔치에서 김태곤의 노래인 ‘송학사’를 곱게 불렀다. 박근혜가 ‘이웃집 아줌마’로 살았다면 순실도 상실이 아니라 진실의 길로 갔을까?

이제는 지워졌을 저도 백사장의 그 글씨가 자꾸 눈에 어른거린다.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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