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0] 외로운 영혼 세상 사람이 두렵네요- 최치원과 두 소녀(中)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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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17   |  발행일 2016-11-17 제22면   |  수정 2016-11-17
“밤 깊어가니 달은 더 빛나는데…헤어지기 싫은 마음 더 사무치네”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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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양저우(揚州)에 있는 최치원기념관(2007년 건립) 맞은편에는 최치원선생기념비와 비각이 있다(위). 최치원기념관 내부(2층) 모습. 최치원의 중국 활동 관련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최치원 앞에 나타난 장씨 자매
눈물 흘리며 속세의 사연 전해

서로 술 권해 마시고 詩 읊으며
세남녀 하룻밤 짧은 연분 쌓아


아름다운 글을 보고 자못 기뻐한 최치원이 심부름 온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더니 ‘취금(翠襟)’이라고 했다. 기쁜 나머지 그녀를 끌어당기자 취금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답장을 주시면 되련만 공연히 사람을 잡아두려 하십니까."

최치원은 곧 시를 지어 취금에게 주었다. ‘우연히 당치도 않은 말로 옛 무덤에 읊었기로/ 어찌 선녀가 세상의 일 물을 줄 생각이나 했겠소/ 취금조차 옥으로 깎은 꽃처럼 아름다우니/ 붉은 소매 그대들은 응당 옥나무에 어린 봄기운 머금고 있으리라/ 이름도 성도 숨겨 속세 나그네 속이고/ 잘 다듬는 글 솜씨로 시인을 괴롭히는구려/ 애타게 원하는 것은 그대들 기쁜 웃음뿐/ 천만 신령에게 빌고 또 비네’

그리고 끝에 이렇게 썼다. ‘파랑새가 뜻밖에도 사연을 알려주니/ 잠시 그리운 생각에 두 줄기 눈물 흐르네/ 이 밤에 그대 선녀들 만나지 못한다면/ 남은 생 지하에 들어가서라도 찾아보리라’

취금이 시를 가지고 회오리바람처럼 빠르게 가버리자 최치원은 홀로 서서 애달피 읊조렸다. 오래도록 소식이 없어서 짧은 노래를 읊조렸는데 마칠 때쯤 해서 갑자기 향기가 나더니, 잠시 후 두 여인이 나란히 나타났다. 정녕 한 쌍의 투명한 구슬 같고 두 송이 단아한 연꽃 같았다. 최치원은 마치 꿈인 듯 놀라고 기뻐 절하면서 말했다.

“이 치원은 섬나라의 보잘것없는 서생이고 속세의 말단 관리라, 어찌 외람되게 선녀들이 범부를 돌아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냥 장난으로 쓴 글인데 이렇게 문득 아름다운 발걸음을 드리우셨군요."

두 여인은 살짝 웃을 뿐 별 말이 없으니, 최치원이 다시 시를 지었다. ‘아름다운 밤 다행히 잠깐 서로 만났는데/ 늦은 봄날에 어찌하여 아무런 말이 없는가/ 지조 있고 아름다운 여인인 줄 알았더니/ 본디 초나라 식부인(息夫人)인 줄 몰랐구려’

이때 자주색 치마의 여인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웃으며 담소를 나눌 줄 생각했더니 갑자기 경멸을 당했습니다. 식부인은 두 남편을 섬겼지만 저희는 아직 한 남자도 섬기지 않았습니다."

최치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은 말을 잘 하지 않지만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군요."

두 여인이 모두 웃었다. 최치원이 물었다. “낭자들은 어디에 살았고, 친족은 누구인지요?"

자주색 치마의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와 동생은 율수현 초성향(楚城鄕)의 장씨(張氏) 집안의 두 딸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현의 관리가 되려 하지 않고 유독 지방의 토호(土豪)가 되기만 힘써, 동산(銅山)처럼 부를 누렸고 금곡(金谷)처럼 사치를 부렸습니다. 저의 나이 18세, 아우의 나이 16세가 되자 부모님은 혼처를 의논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금장수와 정혼하고 아우는 차(茶)장수에게 혼인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마음에 맞지 않아 여러 번 남편감을 바꿔달라고 조르다가 울적한 마음이 맺혀 풀기 어렵게 되고 급기야 요절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의심하거나 꺼리지 마십시오."

최치원이 말했다. “옥 같은 소리 분명한데 어찌 의심하고 꺼리겠습니까?"

이어서 두 여인에게 물었다. “무덤에 깃든 지 오래 되었고 초현관에서 멀지 않으니, 여러 영웅과 만난 일이 있을 터인데 어떤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는지요?"

빨간 저고리 여인이 말했다. “왕래하는 자들이 모두 비루한 사람들뿐이었는데, 오늘 다행히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대의 기상은 오산(鼇山)처럼 빼어나서 함께 오묘한 이치를 말할 만합니다.”

최치원이 술을 권하며 두 여자에게 말했다. “세속의 음식을 세상 밖의 사람에게 드려도 괜찮은지 모르겠군요.”

자주색 치마의 여인이 말했다.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훌륭한 분을 만나 좋은 음식을 받아먹게 되었는데 어찌 함부로 사양하고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술을 권해 마시며 각각 시를 지었는데, 모두 맑고 빼어나 세상에 없는 구절들이었다. 이때 달은 낮과 같이 환하고 바람은 가을날처럼 맑았다. 언니가 곡조를 바꾸자고 하였다. “달로 제목을 정하고 풍(風)으로 운(韻)을 삼지요.”

이에 최치원이 먼저 첫 연을 지었다. ‘먼 하늘 달빛이 눈에 가득한데/ 아득한 수심은 곳곳마다 다 같구나’

팔낭자가 읊었다. ‘달그림자 움직여도 옛길 헤매지 않고/ 계수나무 꽃은 봄바람 기다리지 않고 피는구나’

구낭자가 읊었다. ‘밤이 깊어가니 달빛은 더욱 빛나는데/ 헤어지기 싫은 마음에 한 번 바라보니 가슴 아파라’

최치원이 읊었다. ‘부드러운 달빛 퍼질 때 비단 장막 고루 비추니/ 아름다운 나무 그림자 비치며 구슬창문에도 스며드네’

팔낭자가 읊었다. ‘인간세상과 멀리 이별하니 애가 끊어질 듯하고/ 황천에 외로이 누웠으니 한은 끝이 없어라’

구낭자가 읊었다. ‘언제나 부러워라 항아의 계교/ 규방을 버리고 달나라에 갔네’

최치원이 더욱더 감탄하며 말했다. “이러한 때 앞에 생황 반주나 노래 부르는 이가 없다면 좋은 일을 다 누렸다 할 수 없겠지요.”

이에 빨간 저고리의 여인이 하녀 취금을 돌아보며 최치원에게 “현악기가 관악기만 못하고 관악기가 사람 소리만 못하지요. 이 아이는 노래를 잘 부른답니다”라고 하며 충정을 노래하는 ‘소충정사(訴衷情詞)’를 부르라고 말했다. 취금이 옷깃을 여미고 한 번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청아해서 세상에는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세 사람은 얼큰히 취했다.

최치원이 두 여인을 유혹하면서 말했다. “일찍이 수나라 노충(盧充)은 사냥을 갔다가 우연히 좋은 짝을 얻었고, 완조(阮肇)는 신선을 찾다가 아름다운 배필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그대들이 허락하신다면 좋은 연분을 맺고 싶습니다.”

두 여인이 모두 허락하며 말하였다. “순(舜)임금이 임금이 되었을 때 두 여자가 모시었고, 주랑(周郞)이 장군이 되었을 때도 두 여자가 따랐지요. 옛날에도 그렇게 했는데 오늘은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최치원은 뜻밖의 허락에 기뻐했다. 곧 정갈한 베개 셋을 늘어놓고 새 이불 하나를 펴놓았다. 세 사람이 한 이불 아래 누우니 그 곡진한 사연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최치원이 두 여자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규방에 가서 황공(黃公)의 사위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무덤가에 와서 장씨 여자를 껴안았으니, 무슨 인연으로 이런 만남 이루었는지 알지 못하겠구려.”

그러자 언니가 시를 지어 읊었다. ‘그대 말 들어보니 어질지는 못하군요/ 인연 따라 여종과 같이 잔들 어떠하겠어요’

시를 마치자마자 동생이 그 뒤를 이었다. ‘뜻밖에 바람둥이와 인연을 맺었는데/ 경솔한 말로 신선을 욕되게 하는군요’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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