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남 구례 화엄사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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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25   |  발행일 2016-11-25 제36면   |  수정 2016-11-25
엄절한 절집 무채색에 단풍조차 숨죽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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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오른쪽부터 대웅전, 영전, 원통전, 각황전이다. 앞마당에는 동서 오층석탑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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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67호인 각황전과 국보 제12호인 석등. 각황전 앞의 석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도 가장 크다. 석등 뒤는 원통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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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전과 사자탑. 9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자탑은 용도를 알지 못하며 보물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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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산내 암자인 구층암. 왼쪽은 모과나무로 기둥을 삼은 승방, 오른쪽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천 개의 토불을 모신 천불보전이다.

노랗고 붉은 가을색에 휘청이는 길 달려
화엄사 안마당 오르니 전각들이 한눈에
대웅전 단청·영전 문살 등 온통 무채색

각황전·석등·사사자 삼층석탑 등 국보
구층암 좌우 요사채 모과나무 기둥 눈길


단풍 아래에서, 사람들은 하나 둘 셋과 김치와 치즈를 합창한다. 제각각인 한마음에 고른 화음도 높다. ‘아이고, 예뻐라.’ 할머니는 엄청난 낙엽들 속에서 단 하나를 집어 들고는 손녀 보듯 말한다. 하나든 여럿이든 오래 걷기를, 오래 멈추기를, 숨김없고 수줍음없이 즐거워하기를 자처한다. 지리산의 가을, 저 현란한 붉은빛이 그리하라고 유혹한다. 저 유혹 속에 몸살이 숨겨져 있는 것은 떠나야지만 안다.   

◆화엄사 가는 길, 그 붉은 산란

남원에 들어서자마자 길을 잃었다. 길이 변한 것인지 이정표를 바꾼 것인지, 익숙한 길을 잃으니 당황스럽다. 언제나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이 우리나라의 친절한 이정표지만, 이번은 몸이 기억하는 하늘의 형상에 따른다. 비교적 높은 건물들의 실루엣은 변하지 않았다. 구례로 가는 19번 도로에 올라서야 마음이 놓인다.

밤재 터널을 지나면 길은 장쾌하게 뻗어나간다. 지리산 자락을 타고 나는 활공이다. 이따금 그러나 끊임없이 나타나 마음을 놀라게 하는, 노랗고 붉은 가을 색에 휘청이는 활공이다. 산동과 현천을 지난다. 그 깊숙한 마을은 지금 산수유 붉은 열매가 뒤덮고 있을 것이다. 광의를 지난다. 그 너른 들은 지금 비워져 땅의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오르고 있을 것이다. 용방에 들자 바짝 붙어 따라오는 서시천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며 유혹한다. 천변에 늘어선 수목들이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절대 서시천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화엄사 이정표를 따라 냉천리로 들어선다. 제 각각 가장 선명하고 화려한 색으로 물든 나무들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온다, 밀려온다. 들목에서부터 복작거리며 이어지는 식당과 여관들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을은, 그 모든 사하촌의 분주함을 일격에 진압해 버리고 있다. 반달가슴곰 생태체험장을 지나면서부터 머릿속에 둥둥 북이 울린다. 연기암 가는 입구를 바라보며 온 몸을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늘 어떤 절정을 피해서 다니는 습관은 보호본능이다. 이토록이나 붉은 산란, 길도 하늘도 사람도 모두 찢겨 조각나 흩어진다.

◆지리산 화엄사, 그 무채색의 장엄

작은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 보제루를 끼고 오른쪽으로 오르면 화엄사 안마당이다. 높이 쌓아 올린 대석단 위에 올라서 있는 화엄사의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화엄사는 무채색이다. 대웅전의 단청도, 영전의 옥색 문살도, 둘러싼 산들의 단풍조차도 스스로 채도를 낮추고 있는 듯하다. 정연한 건물들처럼, 땅도 하늘도 사람도, 모두 엄격한 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종각 앞에 선 한 그루 나무만이 불 타듯 붉다. 이 무채색의 엄절한 세계 속에서 그는 홀로 외롭고 약간은 화가 난 듯도 하다.

화엄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기록이 있지만, 현재 절집 안내문에는 6세기 중엽인 544년 백제 성왕 때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중심 전각인 대웅전보다도 먼저 각황전에 눈길이 간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공사 중이던 모습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각의 규모 때문이기도 하다. 국보 제67호, 원래 이름은 장륙전(丈六殿)이었다. 의상대사가 3층으로 건립하면서 사방 벽을 화엄경을 새긴 돌판으로 둘렀다고 한다. 현재 1천500점 정도 남아있는 돌판의 파편들은 대웅전 옆의 영전에 보관되어 있다.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은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한다. 겉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툭 트인 하나의 공간이다. 복잡한 공포구조가 처마 밑을 꽉 채우고 있어 매우 화려하면서도 품위가 단정하다. 각황전 앞에 서 있는 시원시원한 석등은 국보 제12호다.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도 가장 크다. 각황전 왼쪽으로 ‘적멸보궁’ 가는 계단 입구는 출입 금지다. 가파른 화강석 계단 108개를 오르면 국보 35호인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 앞에서 지리산 자락과 화엄사를 내려다보는 순간을 몹시 기대했는데, 화엄사는 올 적마다 하나씩을 감춘다.

마당의 동서 오층석탑은 9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 높이는 모두 6.4m이며, 각각 보물 제132호와 133호로 지정돼 있다. 양탑 가람 형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두 개의 탑은 중심 축이 없다. 오히려 서오층석탑은 각황전에, 동 오층석탑은 대웅전에 가깝다. 화엄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조선 중기 이후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보물 제299호로 지정돼 있다. 각황전 때문에 조금은 왜소한 느낌이 들지만, 정면 계단 아래에서 바라보면 규모도 작지 않고 매우 정연하고 준엄한 모습이다.

◆구층암 가는 길

대웅전 옆길을 오르면 넓은 후원을 통과해 좁은 산길이 구층암으로 이어진다. 후원에는 화엄사의 엄격함에 반항이라도 하듯 현란한 단풍이 펼쳐져 있다. 잰걸음으로 말없이 경내를 소요하던 사람들도 이곳에 들면 폴짝폴짝 뜀박질하고 까르르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10여분간의 혼미한 단풍축제가 끝나면 고요한 암자가 열린다. 앞마당에 깨어진 석탑이 서 있고 구층암 편액이 걸린 건물을 돌아 들어가면 중심 법당인 천불보전이 정면이다.

천불보전을 중심으로 좌우 두 채의 요사채가 있다. 이들은 이름이 없지만 최소 100년을 넘긴 건물이라 한다. 기둥들은 살아 있을 적 그대로의 나무다. 둘레가 160㎝ 정도에 수령 200여 년인 이 나무기둥들은 암자 마당에서 자라던 모과나무다. 마당 왼쪽에서 자라던 모과나무는 왼쪽 요사채의 가운데 기둥이 되었고, 마당 오른쪽에 자라던 모과나무는 오른쪽 요사채의 두 기둥이 되었다. 죽은 채 살아 있는 모과나무 기둥은 여전히 경건하다.

구층암에는 벌써 시린 겨울이 와 있다.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원두막도 비닐로 꽁꽁 싸 매여 있다. 작은 화분의 국화만이 언 주황으로 으슬으슬하다. 이 겨울 빛 암자에서 다시 산길에 들면, 다시 현란한 가을이다. 이 엉킨 계절들이 각자의 뾰족한 끝으로 쿡쿡 사람을 못살게 한다. 가을의 끝도 겨울의 시작도 몸살을 품고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88고속도로를 광주방향으로 가다 남원IC에서 내린다. 남원IC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약 2㎞ 직진하다 고죽교차로에서 구례방향 19번 산업도로를 타면 된다. 구례읍 직전 냉천교차로에서 하동방향으로 조금 가 냉천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직진하면 된다. 문화재 입장료는 어른 3천500원, 청소년과 학생·군인은 1천800원, 어린이는 1천300원이다. 주차료는 따로 없다. 반달가슴곰 생태체험장은 지금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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