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우상의 그늘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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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28   |  발행일 2016-11-28 제31면   |  수정 2016-11-28
[월요칼럼] 우상의 그늘

3년 전쯤의 일이다. 당직근무 중에 신문사에 걸려온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나이 지긋한 어르신 목소리였다. 그 어르신은 다짜고짜 그날 발행된 신문 지면에 대해 불만을 쏟아냈다. 전날 구미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을 1면에 대문짝만 하게 싣지 않은 것을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경험상 그런 전화는 일일이 사정을 설명하거나 반박하면 더욱 곤란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음부턴 박 대통령 사진은 무조건 크게 싣겠다며 어물쩍 넘긴 기억이 있다. 문득 궁금증이 생긴다. 요즘 모든 언론이 박 대통령 사진과 기사로 도배하다시피 하는데 그 어르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론 그 어르신을 비난하거나 비아냥댈 생각은 전혀 없다. 박 대통령의 과거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그 어르신도 속고 국민도 속은 것이기에.

박 대통령은 국민을 철저하게 기만했다. 누구도 그가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국정 농단의 몸통일거라고 상상조차 못했다. 검찰은 ‘국정 농단 게이트’가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공모 하에 이뤄졌다고 적시했다. 검찰이 최씨 등의 공소장에서 밝힌 박 대통령의 범죄 혐의들을 보면 기가 막힌다. 미르재단 설립을 계획하고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 사실상 돈을 뜯어냈다. 또 본인 맘에 안 든다고 대기업 경영인을 갈아치우고, 또 다른 대기업엔 최순실 하수인을 채용시키도록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순실 딸의 초등학교 친구 아버지 업체에 대기업 납품 특혜를 주는 일까지 직접 챙겼다는 대목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동안 박 대통령의 관심사는 국정이 아니라 오로지 최순실 떠받들기였던 셈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까면 깔수록 점입가경이다. 지난 수십 년간 저지른 이들의 비리 사실을 다 모으면 대하소설 몇십 권 분량은 족히 될 것이다. 의문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선 과거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을 앞세운 국정 농단의 근원은 최순실의 아버지인 최태민이다. 일본 순사에서 승려, 사이비 무속인, 목사 등으로 변신을 거듭한 그는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40여년 전부터 당시 큰 영애였던 박 대통령을 사실상 지배했다. 희대의 사기꾼이 절대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부와 권력을 쌓은 것이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큰 영애를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졌는데 이때부터 최태민-최순실 2대에 걸친 대국민 사기극의 서막이 올랐다. 추측이지만 최씨 일가는 이 사기극을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 박 대통령의 이미지 포장을 획책했을 것이다. 원칙, 정직, 소신, 신뢰 같은 박 대통령의 상징성도 우상화를 위한 조작의 산물이었음이 드러났다. 지금 국민의 눈에 비친 박 대통령의 실체는 무능과 거짓, 불통, 오만, 독선이다.

최씨 일가가 기획, 연출하고 박 대통령이 주연을 맡은 이 거대한 사기극에서 조연들의 역할도 빛났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 검찰, 국정원 등에 두루 포진했던 그들은 박 대통령을 신성불가침의 ‘여왕’으로 떠받들면서 추악한 진실을 은폐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최순실 일당을 도와서 만든 우상의 그늘에 숨어 아무런 거리낌없이 악행을 일삼고 탐욕을 채웠다. 지금 국민들은 이들을 썩어빠진 정권의 간신과 내시, 또는 ‘병신(丙申) 역적’이라고 부른다. 최근 온라인에서 누리꾼들이 직접 이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라는데 리스트에 오른 부역자가 200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아마 이들도 처참하게 무너진 박근혜 정권과 함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가능케 한 우상 놀음과 사기극의 결말은 너무도 참혹하다. 국가 시스템은 총체적으로 붕괴됐고 국격은 지하로 떨어져 외국의 조롱거리가 됐다.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국민은 치욕과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다. 그럼에도 국정 농단의 주범과 부역자들은 여전히 뻔뻔하기만 하다. 참으로 사특한 무리들이다. 이들을 제대로 단죄하는 게 새 나라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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