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메밀꽃 같은 할머니 잇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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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2-05 07:57  |  수정 2016-12-05 07:57  |  발행일 2016-12-05 제18면
[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메밀꽃 같은 할머니 잇몸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문패가 셋이나 걸려 있죠. 마지막 문패 속 이름도 이태 전에 떠났어요. 쌀가마닐 지다 삐끗한 허리를 저승까지 데려간 거죠. 할머니 혼자 알전구 밝히고 있죠. 삼십 촉이면 쌀보리며 팔순의 허벅지까지 찔레꽃처럼 눈부시죠.// 그런데, 쌀집 앞 은행나무만 소갈이 났나요. 리어카 묶여있는 앉은뱅이 은행나무만 쇠사슬을 흔들며 투덜거리죠. 가만 생각해보면, 그 은행나무 참 기특하죠. 저 혼자 불쑥불쑥 가지를 늘이면 삼십 촉으론 어림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굴속 같이 어두우면 메밀꽃 같은 할머니 잇몸을 어찌 보겠어요. 그리고 참, 그 은행나무가 기지개를 못 켜는 까닭이 또 있죠. 키질 할 때마다 뛰쳐나온 쭉정이들이 은행나무의 발등에다 뿌리를 내린 거예요. 그 어떤 가로수가 제 작은 밥그릇에 들깨를 들이고 보리 이삭을 패게 할 수 있겠어요. 머리 꼭대기에 주렁주렁 강낭콩 비녀를 꼽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시내 일만 이천 은행나무들이 구린내를 쏴대는데 그 눈칫밥 받아먹으며 어떻게 키를 늘일 수 있겠어요. 녹두 대공과 보릿대 예닐곱이 어깨를 겯고 용을 써보지만 골목골목에서 쏟아지는 눈 흘김 어찌 다 막아 낼 수 있겠어요. 손아귀보다 굵어지면 어찌 할머니의 손을 맞잡고 할아버지의 새벽 천식, 그 기차소리 너머로 손차양을 할 수 있겠어요.// 잠깐, 저길 좀 보세요. 펑크 난 리어카가 낑낑거리며 쌀집으로 들어가네요. 햅쌀 세 가마니가 평당 몇 천만 원의 깔판 위에 몸 부리네요. 쌀가마니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 저 거친 손바닥 아래에다 세상 잔머리들 다 들이밀면 좋겠어요. 강낭콩이며 작두콩, 친친 감긴 식구들과 함께 한 번 들르시죠. 찔레꽃처럼 환하게 저기 저 쌀집에서부터 다시 첫걸음을 내딛자고요.’(이정록 -‘역전쌀상회’)

‘나무 밑둥치에 매미껍질이 붙어 있다. 생의 태반은 저렇듯 투명한 것이다. 더는 날아오를 날개가 없음으로 닫힐 일도 없는 등짝, 울음소리를 날려 보내고야 매미껍질은 나무의 귀가 되었다. 하늘의 숨소리도 여기 나무의 귓바퀴에 와서 덩굴손을 한 번 더 말아 올린다. 귀 하나가 전신인 매미껍질 안에 나무관세음이 있다. 나이테 넓어지는 소리가 저 등짝과 내통하면 천둥이 된다. 천둥번개는 어떻게 잦아드는가? 날개가 지나간 산도로 다시 하늘의 고성방가를 잘게 부수어 들인다. 그러니 운 좋으면 나무의 귀에서 운석을 꺼낼 수도 있다. 이명이 심한가? 온 산 나무이파리들이 까르르 몸 뒤집는다(이정록-‘나무의 귀’)

‘더는 날아오를 날개가 없음으로 닫힐 일도 없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그 와중에 시인은 삼십촉 알전구 아래 메밀꽃 같은 할머니 잇몸을 눈부시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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