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재상정치냐 왕권정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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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2-13   |  발행일 2016-12-13 제31면   |  수정 2016-12-13
[CEO 칼럼] 재상정치냐 왕권정치냐
박봉규 (건국대 석좌교수·전 대성에너지 사장)

조선은 나라를 세우자마자 어떤 통치체제와 권력구조를 채택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신하인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재상중심의 정치사상과 이방원 등 왕족을 중심으로 한 왕권중심주의 철학 사이의 대립이었다.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전자가 오늘날 의원내각제에 가까운 제도라고 한다면 후자는 대통령제에 해당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재상중심주의자들은 말한다. 조선은 왕조국가이므로 혈통에 따라 왕위가 세습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를 이어 항상 유능하고 덕이 있는 왕자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므로 왕은 통치의 상징으로 존재하고 구체적 정치는 재상을 발탁하여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관료와 덕망가 중에서 훌륭한 사람을 재상으로 고르면 적어도 지도자의 자질이 모자라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방원의 견해는 달랐다. 오히려 왕이 중심을 잡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야만 신하들이 날뛰는 것을 막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제대로 펼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개국 초기와 같이 나라의 기틀을 잡는 시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신하에게 권한을 맡겼다가 살해되거나 쫓겨나간 왕의 사례를 무수히 보지 않았냐고 반문한다. 이는 기업의 경우 창업 초기에는 창업자가 전권을 쥐고 업무를 챙기다가 기업의 규모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다른 사람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경우와 같다 하겠다.

두 주장 간의 승패는 ‘왕자의 난’이라는 칼부림을 거쳐 왕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상중심주의 정치사상은 조선의 제도와 정치지도자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았다. 중국과 비교할 때 조선은 전통적으로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한 나라로 평가되었고 사극에서 보듯 “전하, 아니되옵니다”라고 하면서 엎드리면 왕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왕권을 억제할 수 있는 다양한 견제 장치가 정교하게 구비되어 있었고 신하들이 반대하면 왕이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적었다.

정부조직만 보더라도 신하들은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왕권에 대항하였다. 태종이나 세조처럼 왕권에 대한 집착이 강한 왕은 장관들로부터 왕이 직접 보고를 받는 육조직계제를 선호했다. 이에 반해 3정승으로 구성된 의정부에서 육조의 일을 일차적으로 걸러 왕에게 보고하는 의정부서사제는 사실 변형된 재상중심주의이다. 조선은 500년 내내 시대상황과 개인의 권력의지에 따라 끊임없이 육조직계제와 의정부서사제 사이를 왕래하였다. 모든 기간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완벽한 제도는 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최근 나라가 위기에 빠진 이유 중 하나가 권력집중의 폐해를 방지할 수 없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연히 개헌논의의 핵심은 대통령의 권한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의 개편이다.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하되 중간평가를 할 수 있는 4년 연임의 대통령제가 합당하지 않겠는가, 외치와 내치라는 형태로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권한을 확실히 나누는 이원집정부제는 어떻겠느냐, 아예 임기보장 없이 잘못이 있으면 언제라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가 더 좋지 않겠느냐는 등의 내용이다.

그러나 조선의 사례는 우리에게 특정한 제도 자체보다는 오히려 제도에 담길 내용과 정치 문화에 더 주의를 기울이라고 한다.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 하는 얼개 자체보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권한을 어느 정도까지 어디로 분산시킬 것인지, 권력 간에 견제와 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등 소소하다고 느껴지지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장치에 더 관심을 가지고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칫 이상적인 형태에 묻히다 보면 집은 새로 잘 지었는데 그 속에 담긴 가구나 가족의 생활 형태는 예전과 전혀 다름이 없어 또다시 집안이 어지럽혀지는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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