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1] 동창이 밝도록 잠자지 않고- 이이와 유지(下)

  • 김봉규
  • |
  • 입력 2016-12-29   |  발행일 2016-12-29 제24면   |  수정 2016-12-29
선비들의 사랑이야기
“문 닫는 건 인정 없고, 같이 눕는 건 옳지 않아…촛불 밝히고 밤 새우네”
20161229
오죽헌 근처의 율곡 이이 동상.
20161229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인 강릉 오죽헌(烏竹軒). 오죽헌은 뒤뜰에 검은색 줄기의 대나무가 자라 붙여진 이름이며, 오른쪽 ‘몽룡실(夢龍室)’이 이이가 태어난 방이다.

이이가 쓴 ‘柳枝詞’
기생 유지와 순수한 교분 서술
몹시 아끼는 마음은 詩로 표현
조선 호사가들 입방아 우려해
별세후 율곡문집 편찬때 삭제


◆이이가 유지에 대해 읊은 시

‘아! 황해도에 사람 하나 있어/ 맑은 기운 모아 선녀 자질 타고났네/ 마음이며 자태 곱기도 해라/ 얼굴이랑 말소리도 맑구나//

새벽하늘 이슬같이 맑은 것이/ 어쩌다 길가에 버려졌던가/ 봄도 한창 청춘의 꽃 피어날 때/ 황금 집에서 살지 못하는가 슬프다 그 아름다움이여//

처음 만났을 땐 아직 안 피어/ 정만 맥맥이 서로 통했고/ 중매 서는 이 가고 없어/ 먼 계획 어긋나 허공에 떨어졌네//

좋은 기약 다 놓치고서/ 허리띠 풀 날은 언제일까/ 황혼에 와서야 만나니/ 모습은 옛날 그대로구나//

지난 세월 그 얼마였던가/ 슬프다 인생의 무성한 푸르름이여/ 나는 몸이 늙어 여색을 멀리해야겠네/ 세상 욕정 대해도 마음은 식은 재 같으니//

저 곱디곱고 어여쁜 여인/ 사랑의 눈길을 돌리며 나를 못 잊네/ 황주 땅에 수레 달릴 때/ 길은 굽이굽이 멀고 더디더구나//

절간에서 수레 멈추고/ 강둑에서 말을 먹일 때/ 어찌 알았으랴 어여쁜 이 멀리까지 따라와/ 밤중에 내 방문 두드릴 줄을//

아득한 들판에 달은 어둡고/ 빈숲에는 범 우는 소리 들리네/ 나를 뒤따라 온 뜻 무엇인가 물으니/ 예전의 어진 말씀 그리워서라 하네//

문을 닫는 건 인정 없는 일/ 같이 눕는 건 옳지 않은 일/ 가로막힌 병풍이야 걷어치워도/ 자리도 달리 이불도 달리/ 사랑의 정 다 못하고 일이 어긋나/ 촛불 밝히고 밤을 새우네//

하느님이야 어찌 속이겠는가/ 깊숙한 방 속까지 내려 보시니/ 혼인할 좋은 기약 잃어버렸다고/ 차마 몰래 하는 짓이야 하겠는가//

동창이 밝도록 잠 못 이루다/ 갈라서자니 가슴엔 한만 가득/ 하늘엔 바람 불고 바다엔 물결치는데/ 노래 한 곡조 슬프기만 하구나//

아! 본래 마음 밝고도 깨끗해/ 가을 강물 위의 차가운 달이로구나/ 마음에 선악(善惡) 싸움 구름같이 일 때/ 그중에도 더러운 것 색욕이거니/ 선비의 탐욕이야 진실로 그른 것이고/ 계집의 탐욕이야 말해 무엇하나//

마음을 거두어 근원을 맑히고/ 밝은 근본으로 돌아가리라/ 내생이 있단 말 빈말이 아니라면/ 죽어 저 부용성(芙蓉城·저승의 신선 나라)에서 너를 만나리.’

다시 짧은 시 3수를 써 보인다

‘예쁘게도 태어났네 선녀로구나(天姿綽約一仙娥)/ 10년을 서로 알아 익숙한 모습(十載相知意態多)/ 이 몸인들 목석 같기야 하겠나마는(不是吳兒腸木石)/ 병들고 늙었기로 사절한다네(只綠衰病謝芬華)// 헤어지며 정인처럼 서러워하지만(含悽遠送似情人)/ 서로 만나 얼굴이나 친했을 따름이네(只爲相看面目親)/ 다시 태어나면 네 뜻대로 따라가련만(更作尹那從爾念)/ 병든 이라 세상 정욕은 이미 재 같구나(病夫心事已灰塵)// 길가에 버린 꽃 아깝고말고(每惜天香葉路傍)/ 운영(雲英)처럼 배항(裵航)을 언제 만날까(雲英何日遇裵航)/ 둘이 같이 신선 될 수 없는 일이라(瓊漿玉杵非吾事)/ 떠나며 시나 써주니 미안하구나(臨別還慙贈短章).’

1583년 9월28일(癸未 九秋 念八日) 병든 늙은이 율곡이 밤고지 강마을에서 쓰다(栗谷病夫 書于 栗串江村).



◆유지는 이이가 써준 친필 글을 들고

이 유지사(柳枝詞)는 이이 자신과 유지의 교분관계를 서술한 부분과 유지에 대한 생각을 장문의 운문시로 묘사한 부분, 유지에 대한 정을 칠언절구 3수로 표현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분에서 그동안에 일어난 유지와의 일들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그 마지막에 글을 보는 이들이 오해할 것으로 염려해 두 사람의 관계는 ‘정’에서 시작해 ‘예’로 끝난 순수하고 깨끗한 관계였음을 강조해 밝히고 있다.

둘째 부분의 운문시에서는 유지를 어여삐 여기고 몹시 아끼는 이이의 마음이 절절히 묻어난다. 장차 죽어서 저승의 좋은 곳(부용성)에서 다시 만나겠다는 마지막 구절에서 그런 마음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담은 칠언절구 3수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는 그 정황으로 보아 이이와 유지가 서로 운을 띄우고 시를 지어 주고받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이이가 유지에게 이 같은 친필의 글을 써 준 것을 보면, 이이가 유지를 정말 아끼고 사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순수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저명한 학자가 기생과의 일화를 친필로 남길 경우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마련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가 어떤 사회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가 이런 글을 남긴 것은 유지와 자신이 육체적 관계가 전혀 없었음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자신 때문에 유지의 명예가 손상되거나 앞날에 장애가 되는 일이 없게 하려는 배려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이이가 별세한 후 유지는 이이의 친필 ‘유지사’를 첩(帖)으로 만들고 황주를 지나는 사대부들을 찾아다니면서 유지사에 대한 화답을 요청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에게 두 번 이상 찾아가서 화답시를 받기도 했다. 유지의 이와 같은 행위는 이이가 별세한 지 25년이 지난 1609년에도 계속되었다 한다. 유지의 이런 행위는 율곡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유학자가 기생에게 써준 시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진솔하고도 감성적으로 표현해 특별한 감동을 주는 유지사는 조선 후기에도 사대부들 사이에 화제를 모으면서 더러 읽혔다. 하지만 이이의 문집에 수록되지 못했기 때문에 독자의 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이의 문집이 여러 번 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지에게 준 글들이 한 번도 문집에 수록되지 못했던 것은 편찬자들이 모두 이 작품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누락시켰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치암(恥菴) 이지렴이 율곡 문집을 편찬하고 있던 현석(玄石)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다. 이 편지에 의하면 박세채가 편찬한 율곡 문집 초고본(草稿本)에는 유지사와 오언율시 등 유지와 관련된 글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이지렴이 박세채에게 이 글들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박세채는 그 요청에 따라 이 글들을 삭제했다. 유지와 관련된 글들이 ‘율곡의 성대한 덕에 누가 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후세에 모범이 되는 일도 아니므로 삭제하는 것이 옳다’는 이지렴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박세채의 ‘남계견문록’에 의하면, 이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 유지는 서울로 바로 올라와 곡을 하였으며, 또 그대로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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