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 꿈꾸던 소년, 스페인어·한국어 두 개의 詩塔을 쌓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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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3   |  발행일 2017-01-13 제33면   |  수정 2017-01-13
■ 두 개의 말을 부리는 ‘이중언어 시인’ 구광렬
20170113
자기 집에서 발원한 대숲바람이 깔리는 구불구불한 농로에서 그가 눈을 찌푸리며 청명한 겨울 햇살을 만끽하고 있다. 구광렬표 유유자적함이 감도는 순간이다.

내 몸에선 항상 바람 냄새가 피어오른다. 그 바람 밑엔 항상 팜파(초원)가 깔려 있고 그 팜파는 양떼 같은 구름을 몰고 다닌다. 나의 바람은 21세기 버전이 아니다. 중세의 바람이다. 그 바람을 따라 난 오늘 장중하게 길을 떠난다. 목동을 만나고 오로라의 밤을 만나고 비릿한 눈발을 들고 선 자작나무숲도 지난다. 수은빛 진액을 머금은 별빛 아래,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득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나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우물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간다. 젖 같은 강물이 흐르고 웃음소리밖에 없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있는 파라다이스에 난 방금 도착했다. 그늘 좋은 1인용 해먹 위에 올라 최대한 게으른 포즈로 3천만년 정도 줄곧 책만 읽기 시작했다.

눈을 떴다. 빌어먹을 꿈이었다. 다시 현실. 어른이란 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할 수 있는 인내의 근육을 가진 자가 아닌가. 그래야 식솔을 먹여살릴 수 있으니.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미래가 보장되는 직장, 지구촌엔 그런 데가 없다.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 사이, 그곳을 걷는 게 삶이겠지.

젊은 한때는 더 나은 집이 있는 줄 알고 그 집을 찾아다니지만 어느 날부터 포기하지. 모든 집이 걱정을 안고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되지. 바벨탑의 욕망을 가진 피조물에게 하늘이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를 안겨준 것처럼, 우린 모두 같은 말을 갖고도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 이젠 말과 글이 소통의 상징이 아니라 불통의 상징이 된 지 오래야. 그래서 난 인간보다 동물을 더 믿어. 동물의 언어가 내 언어와 소통되지 않는 게 너무 좋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고 어떤 영혼적 교감만 가능할 때, 한 생명은 다른 생명에 대해 최대한의 예의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 스페인어로 사는 한국어

나는 지금 내 고향 대구에서 121㎞ 떨어진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문죽리의 한 대숲집에 살고 있다. 대숲이 대문을 대신한다. 가장이라고 해도 난 집에 묶여있지 않다. 평생 길 위의 나날이다. 1년 중 6개월은 중남미에서 보낸다. 방학엔 어김없이 중남미에서 보내는데, 최근 몇 년간은 이상하게 집에서 머물고 있다. 난 시인이기도 하고 소설가이기도 하고 때론 수필가이기도 하다. 그동안 30권 넘는 각종 책을 집필했다. 그렇지만 난 한국 문단사회와 별 인연이 없다. 중남미에 더 많은 지인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스페인어와 한국어 두 세계에 갇힌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이방인스러움 때문인지 다들 나에게서 집시, 보헤미안, 히피를 읽는다. 어떤 교수는 나를 ‘현대판 목동’이라 부른다. 난 단순하다. 이것이면 이것이고, 저것이면 저것이다. 그 자유로움 때문에 난 자주 파안대소를 한다. 이 웃음의 근본을 찾아가면 난 대책 없이 종횡무진했던 대구시절의 어린 나와 조우하게 된다.

중구 달성동 117-1에서 태어났다. 근처에 한국 3대 홍등가 중 하나로 유명했던 속칭 ‘자갈마당’이 있었다. 내 시심의 일부도 그 유곽(遊廓)에서 발원됐다. 가장 음습한 문화 속에 가장 원초적 기운이 금맥처럼 박혀 있었다. 수창초등학교 시절, 자갈마당 안에는 친구 몇 명이 살았다. 덕분에 홍등가는 내 놀이터가 된다. 한 친구의 어머니는 유곽의 여인이었고 아버지는 서예가였다. 홍등가와 서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그 묘한 밸런스가 내 영혼을 더 숙성시켜주었다. 대다수 그곳의 누나를 마녀(魔女)로 봤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편견이란 그만큼 잔인하고 무서웠다. 유곽의 추억을 딛고 나는 점점 모험심 강한 트러블메이커로 커가고 있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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