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의 반은 지구 반바퀴 돌아 중남미…이질적 문화·말·국적의 한계 탈출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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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3   |  발행일 2017-01-13 제34면   |  수정 2017-01-13
■ 두 개의 말을 부리는 ‘이중언어 시인’ 구광렬
20170113
수십년 멕시코 시인으로 살아서 그런지 언뜻 중남미 현지인 같은 포스의 구광렬 시인. 여전히 네루다 시인의 시집은 그의 ‘수행처’다.

아버지는 대구 중구 달성동에서 꽤 유명했던 ‘청수탕’이란 목욕탕 주인이었다. 덕분에 난 나름 용돈이 풍족했다. 초등 5학년 때 일이었다. 아직 기차 한번 타보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기차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다. 동네 아이들을 총출동시켰다. 저금통을 다 비웠다. 먼 곳까지는 갈 수 없었고, 대구역에서 지천역까지만 갔다. 하지만 돌아올 차비가 없었다. 그냥 밤새 집까지 걸어왔다.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경찰에 집단실종사건으로 신고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기차여행 갖고는 성에 차지 않았다. 더 큰 모험이 필요했다. 나는 경상중을 거쳐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북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모범생의 길과는 인연이 멀었다. 호기심이 생기면 당장 저질러야 직성이 풀렸다.

고교 1학년 때였다. 현재 포스텍 수학과 교수인 박종국, 사업가 이재호씨 등이 친구였는데 그들과 함께 무작정 팔공산 가산산성으로 갔다. 팔공산을 종주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이 가장 춥다는 대한(大寒)이었다. 장갑도 없이 김밥 하나만 사들고 이웃에 놀러가듯 갔다. 죽으려고 작정한 길이랄까. 내가 앞장을 섰다. 능선은 이미 눈밭으로 변해 있었다. 깊은 데는 1m씩 푹푹 빠졌다. 끝내 절벽 근처에서 옴짝달싹 못한다. 동사 직전의 몸이었다. 암릉으로 몸을 던져 무조건 산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와 보니 오전 7시. 동구 불로동이었다.

초등5년때 부모 몰래 동네 또래와 여행
실종 신고 등 영화‘스탠 바이 미’급 추억
고1때도 팔공산 종주 무모한 즉흥도전
100㎝ 눈밭 凍死 직전까지 밤새 헤매

고2 때 책 속 ‘남미의 목동’ 어휘에 매료
비로소 꿈 실체 확인…라틴어 배우려 진학
82년 홀연히 멕시코로 가 박사학위까지
86년엔 동양인 첫 정식 멕시코 시인 등단

파블로 네루다·체 게바라가 영혼의 멘토
인디오 마을서 어우러져 살면서 詩作
스페인어 시집 7권에 한국어 시집도 5권


◆목동 꿈꾸는 여행가

어느 날 우연히 잡은 국내 세계여행기의 신지평을 연 ‘김찬삼의 세계일주’를 탐독한다. ‘남미의 목동’ 대목에 피가 쏠렸다. 내 꿈의 실체가 비로소 ‘목동’이란 걸 절감한다. 목동이 되려면 스페인어를 공부해야 될 것 같았다. 목동의 나라인 칠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는 스페인어권이었다. 그래서 김이배의 스페인어 교본을 봤다. 고교 2학년 때였다. 당시 국내엔 스페인어 전공 학과가 한국외대밖에 없었다. 거기에 입학한다. 다들 내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때는 나도 데모를 했다. 일종의 유행병이랄까. 종로 5가 데모대의 첫 열에 섰다. 최루탄 범벅이 된 채 백골단의 추격을 피해 동대문 안으로 피신했다.

세상 일이란 참 묘했다. 내 친구 중에는 민중운동가의 삶을 사는 친구도 있다. 바로 현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김부겸이다. 그해 추석에 시국사범으로 쫓기고 있던 김부겸 의원이 날 찾아와 숨겨달라고 했다. 여탕 탈의실에 숨겨줬다.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현상수배범이었다.

더 황당한 사건도 겪었다. 외대 시절 한 친구가 내 답안지를 뺏어 제출해버렸다. 그 일로 되레 내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는다. 유급 때문에 군대까지 끌려간다.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다시 1학년이었다. 이럴 순 없다 싶어 3학년 때 멕시코로 건너간다.

◆멕시코 시인이 되다

82년 멕시코로 유학 갈 작정이었다. 당시는 여행자유화 시절이 아니었다. 비자도 안 나왔다. 그런데 궁즉통이었다. 나와 6개월간 스페인어로 펜팔을 한 사람이 바로 멕시코국립대 인문대 여자 학장이었다. 그녀가 추천서를 써주었다. 서울 퇴계로 멕시코 영사관에 가서 3개월짜리 관광비자를 끊었다.

장장 15시간 걸려 멕시코 베니토 후아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동양인은 전혀 볼 수 없었다. 해발 2천400m 초원의 일출, 일어나서 햇살에 비친 야자수를 봤다. 갑자기 울컥했다. 향수병은 멀리 사라졌다. 난 이미 목동인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평화로움이 바람처럼 가볍게 빚어주고 있었다. 난 비로소 시인이 되었다.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주제로 석사학위, 옥타비오 파스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초스피드 박사였다. 동양인으로서는 최초, 동시에 멕시코 국립대 400여년 사상 최단기일 박사학위 소지자가 된다. 10년 걸릴 걸 난 4년10개월 만에 독파한다.

난 스페인어 시인이 되고 싶었다. 드디어 86년에 ‘엘 푼토(마침표)’란 문예지를 통해 정식 멕시코 시인으로 등단한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방인이 멕시코 시인으로 등단한 걸 현지인들도 신기해 했다. 2005년에 ‘멕시코 문협 특별상’을 받고 2009년 5월에 브라질에 본부를 두고 있는 ‘알파스 21’(중남미 문화예술인협회)이 수여하는 인터내셔널 시 부문을 수상한다. 이 상은 중남미권에서는 가장 권위있다.

‘텅빈 거울’이란 스페인어판 시집도 냈다. 멕시코국립대 디아스 교수가 ‘마치 멕시코 원주민이 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평했다. 난 한국적 추억을 스페인어로 노래했을 뿐이었다. 그 교수는 내 시의 한국적 정서가 자국 정서와 그렇게 차이가 없더라고 말했다. 사실 멕시코 원주민인 메스티조(인디오와 백인의 혼혈)도 우리의 한(恨)과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다. 멕시코도 우리처럼 가정 교육을 중시한다. 같은 몽골계라서 생긴 동질감 같았다.

그렇게 해서 발표한 스페인어 시집만 7권이 넘는다. 한국에서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한 이래 ‘불맛’ ‘슬프다 할 뻔했다’ 등 5권의 시집을 펴냈다.

◆여행자의 삶

난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주로 학계 발표나 초대받아 해외에 갈 때 잠시 뭘 구경한다. 일 때문에 여행을 하게 된 셈이다. 난 광장보다 골목, 그리고 이면도로와 전통시장 등을 많이 찾는다. 쿠바의 경우 신·구 아바나가 있다. 구 아바나로 가야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거기에선 거리 음악과 춤을 볼 수 있다.

언젠가부터 국내 중남미 여행 TV방송엔 내가 단골로 초대된다. 그동안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멕시코, 페루, 칠레 등에 이어 조만간 TV조선의 여행 프로에도 출연해 중남미 전역을 돌아볼 계획이다.

방랑자의 삶을 위해 중고 캠핑카를 구입했다. 30여년 전 멕시코 시절부터 이용했다. 캠핑카는 또 다른 집이고 연구실이고 사랑방이다.

1년에 평균 2권씩 책을 낸다. 심도 있는 글은 주로 카페에서 적는다. 캠핑카는 시상 등을 떠올리기 위한 공간. 집의 다락방도 또 다른 창작의 산실이다. 거기는 시는 아니고 소설을 위한 나만의 공간이다. 대다수 장편소설은 그 다락방에서 이뤄진다. 한창 창작욕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면 식음을 전폐하곤 10시간 이상 앉아 있다.

멕시코시티에 오래 살다가 나중에 쿠에르나바카, 타스코 등으로 옮겨다녔다. 2년간은 게레로란 지방에서 인디오와 함께 원시적으로 살았다. 화장실도 없고 전기도 없고 시장도 없고 매스미디어도 없는 곳이다. 돈도 사용할 수 없다. 거기에는 우리의 두레문화와 비슷한 ‘탄다’란 협동문화가 있다. 소 한 마리 잡으면 서로 갈라먹는다.

거기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인간이라는 게 자연의 일부로 발견될 때 가장 아름답다. 나도, 산의 구릉 나무 한 그루, 소도 사람과 함께 공존한다. 사람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로 존재한다. 인디오는 신발도 안 신는다. 신발을 신으면 땅이 아파할 것 같아서란다. 그 추억을 정리한 소설이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다.

내 영혼의 멘토 중 한 시인은 칠레의 대표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 또 한 쪽은 혁명가 체 게바라다.

체 게바라는 햄릿형 돈키호테였다. 무모한 듯 보이지만 치밀했고, 치밀하지만 시적 감흥으로 넘쳤다. 나처럼 동물을 사랑하는 애틋한 사람이었다. 난 네루다 시는 물론 체 게바라가 죽을 때 배낭에 남긴 필사 시들을 분석해 국내에서 책으로 묶어 내기도 했다.

내 시는 시노래로도 잘 불린다. 능숙하지는 않지만 기타를 사랑하고 일상에서도 툭하면 스페인 노래를 흥얼거린다. 스페인 노래를 꽤 잘 소화하는 재즈 보컬리스트 웅산을 위해 스페인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녀가 얼마 전 ‘아시케(나는 바람이어라)’와 ‘미탱고(내 슬픈 탱고)’란 두 편의 시로 작곡을 했다. 레오나르도 피게라란 남자가수가 내 시 ‘야생의 꽃’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들풀’이란 시도 박경하 등 국내 시노래 가수들한테 인기를 얻고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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