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남 강진 다산초당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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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3   |  발행일 2017-01-13 제36면   |  수정 2017-01-13
힘줄처럼 뿌리 툭툭 불거진 길 거닐어 茶山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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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머문 곳으로 이곳에서 500여 권의 책을 썼다. 앞의 연못이 ‘연지석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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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가는 길. 소나무, 삼나무 뿌리가 땅위에 엉키어 있다.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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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안 다산 초상. 현판은 추사의 친필을 집자해 모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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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丁石)’바위. 다산초당 제1경으로 다산이 직접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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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한 천일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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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수련원에서 귤동마을로 넘어가는 산길.

작은 차밭을 지나니 언덕 위 으리으리한 건물군과 마주한다. 다산수련원이다. 전국의 공직자들이 청렴과 애민을 배우는 곳이란다. 건물을 에두르는 산책로가 두충나무 숲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수련원을 벗어나면 산길이다. 오르내리는 300m 길, 무너진 듯 벌겋게 드러나 있는 산의 속살이 위험보다는 매혹이다. 곧 밥집과 찻집 등 몇몇 가게들이 모여 앉은 귤동마을에 닿는다. 여기서 초당까지 다시 300m. 오롯이 상승하는 산행의 시작이다.

숲길·뿌리의 길·바윗길 이어 돌계단 끝
정약용 강진 유배 18년 중 10년 머문 곳
제자 18명 양성·500여권 저술 학문요람
草堂 허물어진 뒤 1957년 기와로‘瓦堂’

초당 뜰 정석·약천·다조·연지석가산
‘다산4景’과 강진만 한눈에 뵈는 천일각
누각 뒤엔 혜장과 오가던 백련사 오솔길

◆초당 가는 길

땀이 난다. 산 공기는 청청하다. 오르막이 고되어서 나는 땀이 아니다. 소한을 지나 대한으로 가는 추운 절기이건만 참으로 날이 포근해서다. 대숲 지나니 솔숲이다.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했다. 소나무 뿌리들이 굼실굼실 땅 위를 어지러이 얽혀 기다 인기척에 죽은 체를 한다. 뿌리는 회색빛 암석처럼 단단하다. 소나무 길에서 삼나무 길로 이어진다. 맑은 흙색의 둥치가 쭉쭉 치솟아 있고 연두색의 이끼가 곱게 내려앉아 있다. 삼나무 뿌리는 밝고 많이 어루만진 듯 부드럽다. 뿌리는 왜 지상으로 왔을까. 가파른 길 차근차근 오르라고 제 뿌리를 내어준 것일까. 넘어질까 두렵다. 계단을 오르듯 가려 밟고 천천히 올라야 한다.

정약용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1801년 겨울,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다 한다. 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의 승하 이듬해였다. 그는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이곳 강진에 유배되었다. ‘다산초당’은 그의 18년 유배생활 중 10여년을 지낸 곳이다.

뿌리의 길 지나면 짧은 바윗길이다. 좁디좁은 물줄기가 길과 나란하다. 사선으로 내려 꽂힌 바위의 우듬지가 축축해 근육이 절로 단단해진다. 다음은 사다리 같은 돌계단이다. 숨을 고른다. 노자(老子)에 ‘머뭇머뭇한다(與), 겨울시내 건너듯. 조심조심한다(猶), 사방을 두려워하듯’이란 말이 있다. 다산은 이를 자신의 호와 경기도 본가의 이름으로 삼았다. 여유당(與猶堂)이다. 흡, 숨 한번 쉬고 다시 오른다. 계단 위로 햇빛에 젖은 하얀 기와가 보인다.

◆떠 있는 삶, 다산초당

지금은 초당이 아니라 와당(瓦堂)이다. 원래는 해남윤씨 집안의 산정(山亭) 초당이었다 한다. 훗날 허물어진 것을 1957년 다시 지으면서 기와를 얹었다. 초당이 자리한 곳은 크게는 만덕산이지만, 옛날에는 귤동마을 뒷산을 다산(茶山)이라 불렀다. 그래서 다산초당이다. 정약용은 이곳에 머물면서 산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강진 유배 초기 8년은 ‘사의재’라 이름 붙인 동문 밖 주막의 객사와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의 집 등을 전전했다. 1808년 봄 초당에 처음 오른 그는 이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시에 담아 전했고, 윤씨 집안에서는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다산은 이곳에서 안정을 얻었고,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썼다.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연못 속에 석가산을 쌓고, 집을 단장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산초부’라고 칭했다.

초당 앞 좁은 뜰 한가운데에 커다랗고 넓고 납작한 바위가 놓여 있다. 다산이 찻물을 끓였다는 차 부뚜막, 다조(茶俎)다. 뒤뜰에는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는 약천(藥泉)이 있다. 다산이 차를 끓이던 물이다. 왼쪽 산비탈에는 정석(丁石)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한다. 초당 오른쪽에는 연못 한가운데 돌산을 쌓아 놓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있다. 다산은 연못에 잉어도 키우며 귀히 여겼다 한다. 이들이 이른바 ‘다산사경(茶山四景)’이다.

옛날 다산초당을 찾아온 전라도 화순사람 나산 처사는 “삶은 떠 있는 것이라, 오늘이라도 사면장이 내려지면 떠날 터인데 왜 이리도 오래오래 살 것처럼 일을 벌였는가”라고 했다. 그러자 다산은 “천하에 떠 있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 있는 화초와 약초, 물과 바위는 모두 나와 함께 떠 있는 것이다. 떠 있다가 만나면 기뻐하고, 떠 있다가 서로 헤어지면 훌훌 잊을 따름”이라 했다. 덧없음의 긍정인가. 그래도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잉어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지금 연못에는 잉어가 없다.

다산초당의 왼쪽에는 제자들의 숙소였던 서암, 오른쪽에는 일종의 서재였던 동암이 자리한다. 모두 복원된 것이다. 동암에서 조금 나아가면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일각(天一閣)’이 서있다. 다산이 이곳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았으리라 생각하며 1975년 강진군에서 세운 것이다. 정자 뒤쪽에는 백련사로 가는 산길이 나있다. 백련사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던 통로다.

저 아래 바다와 들판이 희미하다. 몸이 붕 떠있는 듯하다. 다산의 시대에 들판은 모두 바다였다. 그때는 부유의 느낌이 더 강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목민관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를 생각했고 ‘토지의 균등 분배’를 생각했고 ‘신하가 임금을 몰아낼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그는 ‘떠 있는 삶’이라 했지만, 그의 생각과 마음은 이 땅에 꼭 붙어 있었다. 흙을 움켜 쥔 채 돌 마냥 굳은 나무뿌리처럼.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에서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창원방향으로 가다 칠원 분기점에서 10번 남해고속도로 진주 방향으로 간다. 광양IC로 나가 국도를 타고 순천으로 간 후 순천IC에서 다시 10번 남해고속도로를 타야 한다. 무위사 강진IC로 나가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읍 방향으로 가다 평동교차로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다산초당의 입구는 2군데다. 다산 기념관이 있는 ‘다산초당 옛길’이 먼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다산수련원을 통해 초당으로 가는 길이 있다. 옛길이 정석이고, 거리도 조금 더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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