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TV가이드] SBS ‘영재발굴단’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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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3   |  발행일 2017-01-13 제40면   |  수정 2017-01-13
“우리 아들이 영재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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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영재발굴단에 출연한 영재들. 리듬체조 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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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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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 강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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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 오선우


◆목욕탕 주인과 교장

오래된 목욕탕 안에는 김이 자욱했다. W는 조심스럽게 탕 안으로 발을 넣었다. 차가운 겨울 날씨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벽에 붙어있는 희미한 노란조명이 정겹고 이 시간이 좋았다. 문 닫기 한두 시간 전에는 손님도 별로 없다. W는 몸을 마저 탕 안으로 담갔다.

지그시 눈을 감는 순간 갑자기 찬물이 W의 얼굴을 때렸다. ‘피융, 피융, 콰앙!’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녀석이 냉탕에서 찬물을 퍼 나르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대체 애비란 작자는 뭘 하길래 애를 저렇게 그냥 놔두나? 가정교육이 저래서야 쯧쯧. 이래서 사람이 많은 시간을 피하는 것이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 난 남자가 온 몸에 비누칠을 하며 아이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사칠이 얼마야?” “이십팔” “구구는?” “팔십일” 아이의 대답에 남자는 자랑스럽게 웃으면서 소리쳤다. “아이구 내 새끼 영재다 영재!” W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구구단 좀 한다고 영재면 대한민국 애들 다 영재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기 아이가 어느 한 분야에 재능을 보이면 영재라고 착각하거나 그렇게 될 거라고 기대를 한다. 그러나 오랜 교직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 천만의 말씀이다. W의 아들이야말로 영재였다. 그 당시에는 영재라는 말보다 수재라는 표현을 더 많이 썼지만 학교 다닐 때도 늘 전교 1등이었고 그 어렵다는 서울대 법대에 당당히 합격을 하고 만 20세에 사법시험 최연소합격을 했다. 그런데 구구단 외는 정도로 영재 운운하다니.

스킨로션을 얼굴에 발랐다. 면도한 곳이 따끔거렸지만 싸한 느낌이 좋다. TV에서는 뉴스특보가 방송되고 있었다. 요즘은 매일 매시간 모든 채널에서 청문회 이야기가 나온다. 답답한 국회의원들. 질문할 내용과 방법은 공부해오지 않고 야단치기에 바쁘다. 아무리 정치가 이미지라지만 TV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만 신경 쓸 뿐 내용이 없다. 오히려 청문회에 불려온 증인에게 끌려 다니면서 감정적으로만 반응한다. 저들은 분명 영재가 아니다. 문제의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보도가 나온다. 그의 대답은 “모른다”와 “그렇지 않다”가 대부분이고 국회의원의 논리 없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는 모습이 보인다. W가 얼굴을 찡그리자 목욕탕 주인이 슬그머니 채널을 돌린다. 이 목욕탕 주인은 배려가 몸에 배었다. 그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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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곳곳에 숨어 있는 영재들을 찾아 그들의 일상을 리얼하게 소개하는 SBS ‘영재발굴단’.

◆영재가 아니라 다행이야

TV에는 ‘SBS 영재발굴단’이 방송되고 있었다. 경기도 하남시의 모든 버스노선을 꿰뚫고 있는 6세 암기천재 오선우군. 한 번 버스를 타면 종점까지 내리지 않고 가면서 노선을 모두 외우고 재미있어 한다. 게다가 런던지하철 노선까지 영어로 암기하는데 중간에 아이의 부모가 영어로 질문을 하자 영어로 대답한다. 내친김에 영어로 우주에 대한 설명도 하고 토론도 한다. 게다가 4세 때 구구단을 외우고 지금은 초등 4학년 수학문제를 푼다고 한다. 전문가가 선우군의 영재성을 검사하자 상식분야에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고 한다. W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아무렴 저 정도는 돼야 영재지. 저런 영재가 인류역사를 이끄는 법이지.

이 프로그램은 0.1% 리틀 아인슈타인을 찾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교양프로의 정보와 예능프로의 재미까지 노리는데, 구성이 아주 영리하다. MC와 게스트들의 재치있는 진행이 예능 못지않게 재미있고 수학, 과학, 언어, 미술, 음악, 체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재들을 찾아 소개한다. 그 중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후원의 손길도 연결해주고 전문가와 협업작업을 기획하기도 한다. 보고 있으면 묘기 같은 아이들의 재능에 감탄하며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수건을 정리하던 목욕탕 주인이 W에게 말을 걸었다. “교장선생님도 이 방송을 자주 보십니까?” “나는 방송이라고는 뉴스밖에 안 보는데 영재발굴단은 자주 봅니다. 수십 년간 몸에 밴 직업의식은 어쩔 수 없나 봅디다.” “저도 수요일만 되면 저 방송을 보는데요, 애들이 참 기가 막히데요? 지난번에 자동차 영재 보셨습니까? 장난감 자동차 1천400대를 갖고 있길래 참 별나다 했는데 차량 연비랑 출력을 다 외우고 있더군요.” W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맞아. 그 녀석 경찰서 뺑소니 전담팀에 가서 흐릿한 CCTV화면을 보고도 차종을 정확하게 알아맞히던데? 그래서 실제로 뺑소니 사건해결에 도움을 줘서 표창장도 받았더라고.” “그러게 말입니다. 덕분에 자동차회사 광고도 찍었다더군요. 그 후로도 새로 나오는 자동차가 있으면 제원이나 세부 스펙을 외우면서 익힌다니 참 기특하죠?”

그 말을 듣고 W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지. 애들 부모는 뭐 하나 몰라. 그런 데 재능을 낭비하면 안 되지. 그 좋은 머리로 학교 공부를 하게 해야지. 영어, 수학, 과학 등 요즘 교과목이 만만치가 않아. 그래가지고 어디 대학이나 들어가겠어? 방송 나오고 광고 찍고 상 받았으면 그 정도로 만족해야지.” 그 말을 들은 목욕탕 주인은 수건 접던 손을 멈추고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아이가 자동차를 잘 알게 된 건 그게 너무 재미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구나 재미있는 걸 잘 하고, 잘 하는 걸 더 갈고닦으면 이 사회에서 훌륭한 인재가 되지 않을까요?” W는 의아한 표정으로 목욕탕 주인을 쳐다보았다. 아니 이 자가 지금 나랑 교육에 대해 토론을 하자는 거야?

“자동차 공부를 많이 했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사회가 그 능력을 인정해주겠소? 어차피 경찰관이 되려면 시험을 쳐야 하고 공부를 안 하면 자동차회사에 들어가기는 꿈도 못 꿀 테니까. 교육은 이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오. 부모라면 아이를 대한민국 최고 인재로 키우는 걸 목표로 해야 해. 그게 아이도 잘 살고 나라도 잘 사는 길이지요.” 하지만 목욕탕 주인은 W의 말에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 “그 말씀은 이런 논리가 적용이 되어야 하겠지요. 1단계 영재로 키운 아이는 좋은 대학과 직장에 들어간다. 2단계 그 아이는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를 얻는다. 3단계 그래서 이 사회에 큰 도움이 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맞습니까?” “그렇소. 적어도 그럴 확률이 높지요.”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인류 미래는 밝을까요? 사람들이 더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합니까?” W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답을 했다. “그 그야, 석기시대보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현대사회가 더 풍요롭지 않소?” “삶의 질을 논하자면 조금 더 복잡하겠지만 노동시간은 어떻습니까? 수렵 채집생활할 때 인간은 평균노동시간이 3시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법정근로시간 8시간에다 야간근무에 허덕이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과연 우리가 원시인들보다 훨씬 여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아이를 영재로 키우는 것은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인간의 존재이유는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그때 우체국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손에는 갈색봉투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목욕탕 주인이 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표정으로 반겨주었다. “연말에 배달도 바쁠 텐데 오지 말라니까. 욕탕 청소는 나 혼자 해도 돼.” 남자는 W를 보고는 봉투에서 군고구마 한 개를 까서 건네주었다. “고구마에는 동치미가 딱인데 말입니다. 우유랑 드셔도 맛있습니다. 많이 드세요.” “아이고 이거 고맙소. 아들이 효자네요.” 아들은 TV 리모컨을 쥐더니 24시간 뉴스채널로 돌렸다. 방송에서는 여전히 청와대 민정수석의 청문회소식과 그의 뻔뻔한 태도에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무안해진 W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TV를 보던 아들이 놀라서 목욕탕 주인에게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 아까 그 어르신 청문회에 나오는 저 청와대 민정수석이랑 참 많이 닮았는데요?” 목욕탕 주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아들이 영재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방송PD 8tard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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