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아네모네꽃을 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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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9   |  발행일 2017-01-19 제30면   |  수정 2017-01-19
20170119
안혜련 참문화사회연구소 대표

쉽게 피고 시든다고 바람꽃
무덤에 핀다고 순교자의 꽃
사랑의 괴로움이라는 꽃말
내 20대 어느 자락에 머물다
문득 스치곤 하는 ‘아네모네’


소설 ‘아네모네의 마담’이 생각난 건 순전히 며칠 전 꽃집에서 본 아네모네 꽃다발 때문이다. 커다란 짙은 남색 암술을 둘러싼 작은 진회색 수술들, 강렬한 자줏빛으로 물결치는 꽃잎들이 짙은 벨벳 리본과 어울려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꽃의 여왕이라는 붉은 장미와 어울려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장미의 기를 누르는 듯했고, 도도하게 하늘거리는 양귀비의 모습이 언뜻 스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주요섭이 1936년 잡지 ‘조광(朝光)’에 발표한 ‘아네모네의 마담’은 바로 전 해 나온 ‘사랑손님과 어머니’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단편이다. 내용은 이렇다. 다방 아네모네의 마담 영숙은 한 전문학교 학생을 흠모하고 있다. 창백한 얼굴과 강렬한 눈빛을 가진 이 청년은 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신청하고 애정과 열정이 넘치는 눈빛으로 영숙을 응시하다 가곤 하는데, 영숙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느 날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이 이 곡이 흐르자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며 레코드판을 깨뜨렸고, 영숙은 그의 친구를 통해 그간의 사정을 듣게 된다. 학생은 한 교수 부인을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건강이 좋지 않은 부인의 병문안을 갈 수도 없었다. 청년은 아네모네 다방 영숙의 자리 뒷벽에 걸린 ‘모나리자’를 보며 부인의 모습을 그리워했고, 두 사람 간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미완성 교향곡을 들으며 애달픈 사랑을 달랬다. 그런데 그날 부인이 세상을 떠났고, 그는 상심한 채 이곳에 들렀다가 그런 돌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영숙은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서글픈 심정이 된다는 이야기다.

아네모네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로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란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알뿌리에서 7∼8개의 꽃줄기가 자라 줄기 끝에 빨강, 하양, 보라, 파랑 등 갖가지 색의 꽃이 하나씩 피는데, 바람(그리스어 Anemos)에 피고 질 정도로 쉽게 피고 시든다고 해 ‘바람꽃’으로도 불린다. 제2차 십자군 원정 때 예루살렘 성지에서 가져온 흙에 아네모네 알뿌리가 들어있었고, 이 흙을 뿌린 순교자 무덤에 피같이 붉은 꽃이 피어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꽃을 순교자의 꽃 혹은 부활제의 꽃(Easter flower)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스신화에서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라는 미소년을 사랑하자 그녀의 연인이자 전쟁의 신인 아레스가 질투심에 불타 멧돼지로 변해 사냥을 좋아하던 아도니스를 죽였고,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의 피 위에 뿌린 술에 거품이 일고 그 자리에 핏빛 아네모네가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이룰 수 없는 사랑, 이별 후에 느끼는 안타까운 심정 등을 아우르기 때문인지 아네모네의 꽃말은 ‘사랑의 괴로움’이다.

19세에 첫 소설을 발표한 주요섭은 처음에는 하층계급의 생활을 그리는 사회주의 경향의 작품을 쓰다가 차츰 인간의 내면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물론 사회주의 성향의 작가들이 이념 색채가 강한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쪽으로 기울자 그 한계를 의식해서일 수도 있겠고,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에서 지식부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 사회 문제와 거리를 둔 결과일 수도 있겠고, 사랑의 감정과 결혼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서일 수도 있겠다. 30대에 발표한 ‘사랑손님과 어머니’ ‘아네모네의 마담’에서 그는 남녀 간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미묘하게 싹트고 발전하고 좌절을 겪는지 섬세하게 보여주는데, 심리변화나 감정의 흐름에 대한 자연스럽고 차분한 묘사가 오히려 주인공들의 애절함을 더하는 것 같다.

2015년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 역의 전지현과 하와이 피스톨 하정우가 만난 카페 이름도 ‘아네모오-네’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빠질 수 있는 착각과 허망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아네모네의 마담’은 내 20대의 어느 한 자락에 머물다 불현듯 이렇게 스치곤 한다.안혜련 참문화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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