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참나에게도 미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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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3 07:46  |  수정 2017-01-23 07:46  |  발행일 2017-01-23 제15면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널리 알려진 알렉상드르 뒤마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남긴다. ‘인간의 모든 지혜를 두 단어로 요약하면 그것은 기다림과 희망이다.’ 주지하다시피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에드몽 단테스는 은밀한 연적인 사촌과 친구에게 나폴레옹의 스파이로 밀고당한다. 부당하게 투옥당한 주인공이 탈출하여 부를 쌓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사람들을 향해 복수하고 친절을 베푼 이들에게 은혜를 갚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남긴 기다림과 희망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지혜라는 말은 단테스와 같이 기다림과 희망을 통해 복수를 할 수 있다는 뜻일까?

기다림과 희망은 바람직한 미래와 관련된 말이다. 기다림은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고 견딘다는 것이고, 희망은 현재를 참고 견디기 위해 실현된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성인들이 가르쳤듯이 우리는 결코 미래를 살 수 없다. 그것이 두려움이든 희망이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미래’라고 그려보는 현재일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미래라고 그려보는 현재로 인해 진정한 현재는 훼손당하게 된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 여기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희망이나 소망과 같은 미래와 관련된 말은 우리 삶에서 폐기처분해야 하는 단어일까?

기독교에서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소망을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때의 소망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한 기대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항상 현재보다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만약 미래가 현재보다 못하다는 것이 확실하면 더 이상 삶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우리는 희망이 있기에 행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과거나 미래가 에고의 작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에고는 결코 현재 속에서 살 수 없다. 에고는 오직 기억으로 저장된 과거와 상상으로서의 미래 속에서만 살아간다. 레너드 제이콥슨은 ‘현존’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미래는 결코 도착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지금 이 순간밖에는 삶이 없습니다. 영적인 깨어남 혹은 깨달음이란 과거와 미래라는 마음의 세계로부터 지금 이 순간의 진실과 실재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깨어난 현존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사라지고 없으며, 당신에게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지금 안에서 깨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셀프(참나)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일까? 셀프에게도 미래는 있다. 그것은 본성의 실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본성의 펼쳐짐으로서의 미래만이 우리에게 허용된 미래다. 작은 도토리에서 커다란 굴참나무로 그 본성이 펼쳐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 인간이면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인(仁), 즉 사랑이 펼쳐져 사랑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오직 셀프만이 가질 수 있는 미래이고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작은 화분에 식물을 키우는 것은 본성의 발현으로서의 미래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씨앗이 싹이 트고, 하늘을 향해 마음껏 자라나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다. 그래서 작은 화분에 꽃씨를 심으면서 우리는 이미 그 꽃씨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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