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건정치칼럼] ‘반기문의 열흘’과 한국정치

  • 송국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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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3   |  발행일 2017-01-23 제30면   |  수정 2017-01-23
20170123

동서·좌우 넘나든 귀국행보
양극단 대치 상황에 부적합
SNS를 달군 잇단 실수들은
朴 탄핵정국서도 나타났듯
진실과 왜곡 엉킨 현실 반영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주말 일정을 취소하고 전략회의를 가졌다. 일단 숨을 골라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지난 12일 귀국한 반기문은 이후 열흘 동안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두 갈래였다. 하나는 당초 예상했던 주변과 관련한 검증. 귀국 직전에 한 언론은 반기문이 외교부 장관과 사무총장 취임 직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23만달러를 받은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귀국한 날엔 동생 반기상, 조카 반주현씨가 미국에서 기소됐다. 고(故)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소유한 베트남 랜드마크72 빌딩 매각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준 혐의였다. 두 사람은 “거래가 성사되면 그건 순전히 우리 가족의 명성에 기반을 둔 것”이라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팔았다고 한다. 반기문은 “나는 모르는 일이지만 친인척 문제로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한 갈래 신고식은 반기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젊은 네티즌들의 관찰 대상이 되면서 하루 한 건 꼴로 실수(?)하는 장면들이 인터넷을 달궜다. 귀국 당일 편의점에서 외국산 생수를 집어들었다가 수행원의 귀띔으로 국내산으로 바꾸고, 도시철도 티켓 자동 발매기에 1만원권 지폐 두 장을 한꺼번에 넣으려고 했던 해프닝이 시작이었다. 이후 서울 국립현충원 참배 때 방명록을 쓰면서 미리 준비한 쪽지를 보고 옮겨쓰고, 충북 음성꽃동네를 방문해 턱받이를 한 채 누워있는 어르신에게 미음을 떠먹이는 모습도 논란이 됐다. 선친 묘소에서 퇴주잔을 버리지 않고 음복했다며 제사예절도 모르는 대선주자라는 비난을 들었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와 관련해 말을 바꾸고 있다며 집중적인 질문 공세에도 시달렸다. 참다 못한 반기문은 기자들을 겨냥해 “나쁜 놈들”이라고 측근에게 말했다가 그 녹음이 공개됐다.

정치적 행보도 도마에 올랐다. 귀국 일성으로 “정권교체가 아닌 정치교체를 하겠다”고 한 말은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이명박·박근혜정부의 시즌2를 하겠다는 거냐’는 비판을 받았다.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지칭했다가 “양다리 걸치기”라는 지적에 부딪쳤다. 평택 2함대 사령부의 천안함 추모시설, 부산 유엔공원, 김해 봉하마을, 진도 팽목항, 광주 5·18 민주묘지, 대구 서문시장 등 동-서와 보수-진보를 넘나드는 탐방을 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반기문은 “국가통합, 국민화합 차원”이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우파와 좌파로 극명하게 갈린 한국정치에선 ‘회색분자’로 낙인찍힐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보수의 마음을 얻지 못해 지지율은 답보였다. 당초 기대했던 ‘컨벤션 효과’는 없었다. 마침내 반기문은 주말 일정을 중단하고 대선 밑그림을 백지상태에서 다시 그리고 있다.

반기문에겐 억울한 측면이 있다. 친인척의 비리 의혹 같은 건 당연히 다뤄져야 할 문제다. 이념과 노선 정립도 반기문의 정체성 확립에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네티즌들이 SNS 상에서 고령의 반기문을 골려먹는 모습은 다르다. 퇴주잔 소동은 악의적인 편집이었던 걸로 드러났다. 턱받이, 미음 논란도 꽃동네 측에서 권유한 걸로 확인됐다. 외국산 생수를 집어들고, 1만원권 두 장을 발매기에 집어넣은 것도 오랜 외국생활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다. 심각한 건 이런 ‘페이크 뉴스’(가짜뉴스)가 SNS에 돌아다니면 당사자에 대한 신뢰도는 순식간에 망가진다. 나중에 해명해도 이미지는 남는다. 굳이 반기문의 문제만은 아니다. 진실과 왜곡이 뒤엉키는 한국정치의 한 모습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도 그런 형태가 완전히 없었다고는 하기 어렵다. 서울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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