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거짓 확인서

  • 조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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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4   |  발행일 2017-01-24 제30면   |  수정 2017-01-24
[취재수첩] 거짓 확인서

지난해 8월 구미 한 대형마트 직원의 갑질 횡포를 폭로하는 한 통의 제보 전화를 받았다. 당시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롯데마트·홈플러스·이마트 등 대형마트 3사에 유통업법 위반으로 과징금 238억9천만원을 부과하는 등 이른바 ‘갑질’에 대한 감독 수위를 높이고 있던 시기였다. 입점업체 위에서 군림하는 대형마트의 갑질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기 충분했기 때문에 약속을 잡고 제보자를 만났다.

대형마트 내 육류업체 팀장으로 일했던 제보자 A씨는 힘들게 이야기를 꺼냈다. A씨에 따르면 마트 실장 B씨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온갖 방법으로 갑질을 했다. B실장과 부하 직원들은 수시로 A씨에게 찾아가 선물과 식사비를 요구했다. 그때마다 A씨는 ‘요구를 무시했다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B실장은 대놓고 선물을 달라고 말한 적도 있지만 ‘저거 마음에 든다’는 식으로 돌려 말하며 자신에게 선물할 것을 종용한 적이 많았다. B실장은 툭하면 A씨를 찾아가 술을 마시자고 요구했고, 심지어는 노래방이나 가요주점에 간 뒤 성접대까지 강요했다. 이 때문에 항상 A씨는 주머니에 현금을 두둑히 지니고 다녀야 했고, 2년4개월 동안 B실장 등에게 쓴 돈이 셀 수 없을 정도라고 주장했다.

A씨의 제보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기자는 해당 마트에 찾아가 점장 등 관계자에게 사실 여부를 물었다. 모르쇠로 일관하던 점장은 취재가 이어지자 며칠 뒤 태도를 바꾸고 제보자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제보자의 입만 막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며칠 후 제보자 A씨의 집까지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사실상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셈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잘못을 인정하는 척 연기작전을 펼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작전이 성공했던 것일까. 당시 제보자가 심한 갈등을 느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A씨는 사실을 보도하려는 기자에게 보도를 하지말아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다. 며칠 뒤 보도가 나갔고, 마트 측의 회유 작전도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그러던 중 해당 마트의 본사 윤리경영팀 직원이 구미로 내려와 제보자 A씨를 찾아갔다. 그들은 A씨에게 구두로 일정 부분 보상을 약속하면서 ‘거짓 확인서’를 내밀었다. 제보내용, 보도내용 등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약해진 A씨는 거짓 확인서에 서명했고, 더 이상의 추가 취재는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사건 보도 후 해당 마트 측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겠다며 B실장의 사직서까지 반려시키고 자체 조사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트 측은 B실장 갑질 사건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결론 내렸고, B실장 역시 예전처럼 근무하고 있다. A씨는 별다른 보상도 받지 못하고 경제적, 신체적 피해와 함께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생계를 위해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A씨는 지난해 말부터 틈만 나면 해당 마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하루빨리 갑과 을이 따로 없는, 믿음이 넘치고 약속을 지키는 사회가 되길 기대해 본다.

조규덕기자 <경북부/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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