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살처분

  • 이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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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4   |  발행일 2017-01-24 제31면   |  수정 2017-01-24

이달 초 농어촌 지역에서는 때아닌 ‘닭 잡기’가 일괄적으로 실시됐다. 100마리 이하 소규모로 기르는 닭을 모조리 잡는 이른바 ‘소규모 살처분’ 행사였다. AI 확산 예방을 위한 정책적 조치의 하나였다. 노지에 풀어 놓거나 지붕이 없는 시설에서 사육하는 닭은 철새의 배설물로 인해 AI 바이러스와 접촉할 가능성이 높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전국에 소규모 가금류 살처분을 지시했다. 살처분이라는 말의 살벌함을 감추기 위해 ‘자가도태(自家淘汰)’라는 말로 명을 내렸다. 닭과 오리·거위 등 집에서 사육하는 모든 조류가 대상이다.

자가도태에 응하는 농민들은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날마다 모이를 주고 계란을 얻어내다 보면 닭에게도 정이 들기 마련이다. 그 정든 닭을 한두 마리도 아니고 몇 십 마리를 한꺼번에 잡는 것은 주인 된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억울하기도 하다. 좁은 케이지에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사료와 물만 먹고 알을 뽑는 산란계나 3.3㎡에 70~80마리씩 기르는 육계에 비해 이들은 병에 강하다. 이들에게 AI는 독한 감기일 뿐이다. AI로 죽을 확률은 매우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사육농가를 위해 죽어야만 했으니….

지난 21일까지 살처분한 가금류는 3천270만 마리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사상 최악의 살처분이다. 농어촌 지역에서 소규모로 기르는 가금류까지 전국적으로 살처분이 행해진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AI에 대해 살처분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다른 방법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이야기돼 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닭고기 소비 패턴이 유지되는 한 다른 방법은 요원하다. 잔인한 이야기지만 닭(육계)의 입장에서는 살처분당하는 것이나 예정된 생을 다 사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육계의 사육기간은 최장 35일이다. 한 달 정도 살면 도축장으로 보내진다. 우리가 치킨이나 삼계탕 등으로 소비하는 육계의 입장에서 살처분과 도축은 그냥 며칠 더 사느냐 마느냐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만 하루 평균 닭 300만 마리가 도축된다. 치킨 등으로 가공되기 위해 일상적으로 살처분되는 닭이 연간 10억 마리에 이르는 것이다. 간식과 술안주를 위해 연간 10억 마리를 죽이는 마당에 살처분 3천만 마리가, AI 대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하수 중부지역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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