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2] 매화 가지에 새봄을 걸어서- 김응서와 계월향(下)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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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6   |  발행일 2017-01-26 제22면   |  수정 2017-01-26
“목숨 부지하시어 나라를 구하십시오”…武將 살리려 자결 택한 義妓
20170126
한시각(1621~?)의 1664년 작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중 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 일부. 함경도 길주에서 처음 열렸던 과거시험(별시) 중 무과시험 장면을 그렸다. 김응서는 1583년 별시 무과에 합격해 무신 벼슬을 한 인물이다.

평양 사람들, 계월향 충절 기려
그녀가 배 가른 고개를 ‘가루개’
고개 일대는 ‘월향마을’로 불러
모란봉 기슭엔 사당·비석 건립

‘다정을 슬퍼하고 무정을 사랑…’
만해 ‘계월향에게’ 詩로 넋 위로


◆적에게 몰린 계월향은 자결하고

계월향이 김응서의 등에서 몸을 빼어 땅으로 내려왔다. 땀으로 얼룩진 김응서가 놀라 돌아보니 이미 계월향은 장도를 높이 쳐들고 의연하게 소리쳤다.

“나으리는 어서 몸을 피해 나라를 구하십시오.”

“무슨 소리냐? 어찌 너를 두고 나 혼자 목숨을 건진단 말이냐?”

그러나 계월향의 결심은 단호했다.

“나으리는 대장부가 아니십니까? 어찌 이같은 인연에 연연해하십니까? 저는 어차피 왜놈에게 더럽혀진 계집입니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나 나라를 살리는 데 보탬이 되겠다는 명분으로 지금껏 목숨을 버텨왔습니다. 이제 소첩의 소임은 여기가 끝입니다. 제발, 목숨을 부지하시어 승리를 거두십시오.”

적의 추격이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가 계월향의 귀를 스쳤다. 그녀는 높이 쳐든 장도를 자신의 배를 향해 힘껏 내리꽂았다. 김응서는 눈물이 솟구쳤다. 사랑하는 계월향의 죽음을 보면서도 어찌하지도 못하고 한 걸음이라도 빨리 도망가야 하는 그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한편 왜군은 이렇게 장수를 잃어버리자 대혼란에 빠지고, 마침내 이듬해 1월 평양성은 다시 수복되었다. 적장의 죽음으로 크게 놀란 왜군은 기세가 꺾여 오래 맞서지 못하고 퇴각한 것이다.

계월향의 최후에 대해서는 다르게 묘사한 기록도 있다. 1815년에 그려져 평양 장향각(藏香閣)에 봉안된 계월향 초상화 상단에 ‘의기 계월향(義妓 桂月香)’이란 제목으로 기록된 내용이다.

‘고니시 히라는 뛰어난 장수가 평양성에 먼저 올라 우리 진을 함락시키니,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를 중히 여겨 위임을 했다. 평양부 기생 계월향은 고니시 히에게 잡힌 뒤 귀여움을 지극히 받았지만 성을 빠져나가고자 했다. 그는 무관이던 김경서 장군을 친오빠라고 속여 평양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어느 날 밤, 왜장이 깊이 잠들자 김 장군을 장막으로 몰래 들어오게 했다. 양 허리에 찬 칼을 손에 쥔 채 의자에 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잠을 자던 왜장의 목을 김 장군이 벴다. 목이 땅에 곤두박질쳤는데도 왜장이 쌍칼을 던지니 하나는 벽에, 다른 하나는 기둥에 꽂혔다. 두 사람 모두 성을 빠져나가고자 했으나,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게 되자 (계월향의 청으로) 김 장군이 칼을 뽑아 계월향을 죽이고 성을 빠져나갔다. 이튿날 적군은 왜장의 죽음을 알고 기가 꺾이고 형세가 크게 위축됐다.’

성해응(1769~1839)의 문집인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계월향은 평양 기생이다. 임진년에 왜적이 평양성을 점령하였을 때 별장 김응서가 용강, 삼화, 증산, 강서 네 읍의 군(軍)으로 평양의 서쪽에 20여 진지를 설치했다. 왜군의 우두머리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이던 자는 용맹하여 맨 먼저 성벽에 올라가서 진을 함락시켰고, 계월향을 얻어서 무척 사랑했다. 그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누각(樓閣)은 깊은 곳에 있고 방어가 무척 견고하였으며, 사람들을 통제해 들어갈 수 없었고, 오직 계월향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때 심유경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 고니시와 조약을 맺어 평양 서쪽 10리에 표를 세워 조선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왜군이 병력을 거두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양성을 왕래할 수 있었다. 계월향은 비록 왜적 우두머리의 사랑을 받았지만 어떻게든 도망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두머리에게 청하여 부모님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고, 우두머리는 허락했다.

즉시 성루에 올라가 ‘내 오라버니는 어디 계시오?’하고 외쳤다. 응서는 마침 왜군을 정찰하러 성 아래에 와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다’라고 대답하였고, 계월향이 그를 맞아들여 은밀히 ‘공께서 나를 탈출시켜 주신다면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소’ 하고는 그를 이끌어 성으로 들어가서 왜군 우두머리에게 보였다. 왜군 우두머리는 응서를 계월향의 오빠로 생각하고 무척 친하게 여기며 신뢰하게 되었다.

계월향은 왜군 우두머리가 잠든 틈을 타 몰래 응서를 끌어들였다. 왜군 우두머리는 의자에 걸터앉아 자는데, 얼굴을 붉히고 눈을 부릅뜬 채 왼손으로는 방울 끈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사람을 베려는 듯 칼을 잡고 있었다. 응서가 그를 베었다. 우두머리는 죽었으나 방울 끈이 움직였고 검이 땅에 떨어져서 땅에 여러 자(尺)의 구멍이 뚫렸다. 마침내 왜군들이 방울 소리를 듣고 시끄러워졌다. 계월향이 (그들을) 맞아서 말하기를 ‘장군이 취한 것일 뿐 다른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드디어 왜군들이 물러났다. 응서는 우두머리의 머리를 차고 나가려 했고, 계월향은 옷을 잡아끌며 그를 따랐다. 응서는 둘 다 온전하게 되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곧 계월향을 베었다. 성을 넘어 군에 도착해서 그 머리를 높이 걸어 왜군들에게 보였다. 왜군들이 그로 말미암아 기세가 움츠러져 감히 나오지 못했다.’

◆평양에 세워진 계월향 순절비

왜장 고니시 히를 처단하고 자신은 배를 갈라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계월향의 애국충정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가 배를 갈랐다는 고개는 ‘배를 가른 고개’라 하여 ‘가루개’라 부르고, 그 일대는 ‘월향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평양 사람들은 모란봉 기슭에 계월향의 순절과 충렬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당 ‘의열사(義烈祠)’를 건립하고 비석을 세웠다. 그 전에도 사당과 비석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1835년에 평안감사로 있던 정원용(鄭元容)이 비문을 짓고 김응근이 써서 세운 ‘의열사의기계월향비문(義烈祠義妓桂月香碑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정원용이 평안감사로 와서 늙은 기생 죽섭(竹葉)으로부터 의기 계월향의 이야기를 듣고 사적을 들추어 자세한 것을 살펴서 그의 공이 크기에 사당과 비석을 건립하고 춘추로 제향하게 했다.’

그 후 북한은 1955년 가루개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을 통합해 ‘월향동’이라 개칭했다. 만해(萬海) 한용운은 훗날 ‘계월향에게’라는 시로 그녀의 넋을 위로한다.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大地)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붉은 한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저문 봄을 잡아매려 합니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볕을 받치고 매화(梅花)가지에 새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속하면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이여.’

계월향의 작품으로 전하는 ‘송인(送人)’이라는 시가 있다.

‘대동강 가에서 정든 임 보내니(大同江上送情人)/ 천 개의 버들가지로도 우리 임 매어두지 못하네(楊柳千絲不繫人)/ 눈물 머금은 채 서로 마주 보며(含淚眼着含淚眼)/ 애간장 끊어지는 슬픔을 삼킬 뿐이네(斷腸人對斷腸人)’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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