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남 나주 영산포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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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27   |  발행일 2017-01-27 제36면   |  수정 2017-01-27
끊어진 뱃길에 빛 잃은 등대…‘五感 아찔’ 삭힌 홍어만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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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영산포. 영산포 등대는 근대 문화유산이 되었고 황포돛배는 유람선이 되었다. 포구 너머 옛 선창 거리는 홍어집들이 가득한 홍어의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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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 제129호인 영산포 등대. 1915년에 세워진 것으로 유일한 내륙 등대다. 작은 사진은 죽전거리에서 만난 등대의 옛 모습. 1989년까지 영산강의 수위를 관측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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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 둑길. 영산 가람길 110㎞가 강과 함께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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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 홍어의 거리. 전문 음식점과 도매점이 수십 곳이며 해마다 4월이면 홍어 축제가 열린다.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강 포구. 옛날에는 예까지 바다가 밀려 들어왔다고 한다. 수많은 배들이 밀물과 썰물을 타고 드나들었다. 고려 때 이미 조창이 설치될 정도로 주변의 산물이 모여들기 좋은 땅 자리, 강 자리였다. 산물은 산처럼 쌓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의 기록에는 이 고을을 ‘남방의 대목’이라 했다. 1976년 강 상류에 댐이 건설되었다. 77년 이 포구에서 마지막 배가 나갔다. 78년 강 하구에 둑이 착공되었다. 지금은 재현된 옛 황포돛배 유람선만이 강 물살을 가른다. 전남 나주의 영산강 영산포다.

영산강 300리 물길 가운데 자리한 포구
고려 때부터 조창 설치 물자교역 중심지
1978년 하굿둑 만들며 뱃길 막혀 쇠락
1915년 세운 유일한 내륙 등대 기능상실

먼 뱃길이 만들어낸 ‘삭힌 홍어 발원지’
둑길 건너 홍어거리 가게들 전국적 인기


◆영산강 영산포

영산강은 전남 담양에서 발원해 광주, 나주, 영암을 거쳐 목포에서 바다로 흘러든다. 총 길이 122㎞에 이르는 우리나라 4대강 중 하나다. 그 큰 물길 가운데에 영산포가 있다. 조선시대 나주는 ‘작은 한양, 소경’이라 할 만큼 번화한 곳이었다. 영산포에는 국영창고인 영산창이 있었고, 조선 중종 때 영광 법성창이 생기기 전까지 전남 17개 고을의 세곡이 이곳에 모였다. 이후에도 오래 영산포에는 남도의 숱한 어선이 모여들었다. 홍어와 소금 등 온갖 해산물이 산을 이뤘고, 여기서 다시 내륙의 대처로 팔려나갔다.

옛날의 배들은 대부분이 거룻배였다. 그 사이를 위풍당당 헤치고 등장하는 것이 황포돛배였다. 목포에서 출발한 황포돛배가 영산포까지 오는 데는 세물 때가 걸렸다고 한다. 세 번의 밀물을 타는 사이에 두 번의 썰물 때는 멈춰야 했다. 서른 시간의 항해였다. 목포로 돌아가는 길은 조금 빠른 두물 때, 18시간이 걸렸다.

1897년 목포가 개항되면서 일제는 일찌감치 영산포에 주목했다. 1904년 나주나 광주보다 먼저 헌병대가 설치되었고, 우체국과 주재소가 들어섰다. 그리고 목포와 영산강을 오가는 최초의 동력선 ‘평남환(平南丸)’을 취항시켰다. 자국민 수송과 미곡 반출을 위해서였다. 배의 운항 시간은 5~6시간. 동력선이라는 혁신적인 운송수단의 등장과 함께 영산강의 황포돛배는 모두 사라졌다. 지금은 2008년 새롭게 등장한 황포돛배가 영산강 10㎞ 구간을 유람한다.

1914년에는 영산포 옆에 개폐식의 나무다리가 놓였고, 1915년에는 다리와 직선으로 연결된 영산포역이 영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등대가 세워졌다. 유일한 내륙 등대인 영산포 등대다. 등대는 밤을 밝혔고, 수위를 재는 역할을 했다. 목교는 1933년 철근콘크리트 다리 ‘영산교’로 바뀌었다. 1972년 영산대교가 놓이면서 영산교는 ‘영산포구다리’로 불린다. 구다리는 1999년 새로 놓였지만 여전히 구다리다. 다리에서 강과 포구와 돛배와 등대가 훤하다. 자전거길 시원히 달리는 둑길 너머 포구 마을도 한눈이다. 강도 조용하고 길도 조용하다. 더 빠르고 더 편리한 교통수단의 발달은 수운의 침체를 가져왔고,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의 건설은 영산포에 완벽한 고요를 선사했다.

◆영산포 홍어의 거리, 죽전거리

흡. 잠시 숨을 멈춘다. 영산포 둑길에서 좁은 도로만 건넜을 뿐인데 공기가 다르다. 강바람도 이길 수 없었나, 홍어의 향. 매운 겨울바람보다 더 맵다. 강변마을 가겟집이 모두 홍어집이다. 가끔 먼데서 온 손님이 가겟집 문을 열 때마다 알싸한 향은 더 진해진다. 영산포에서는 고려 말부터 600년 이상 흑산도 홍어가 거래되어 왔다고 한다. 긴 뱃길에 흑산도 홍어는 상해버렸고, 상해서 만들어진 알싸한 맛과 향기에 도로 반해 부러 삭혀먹게 된 것이 영산포 홍어다. 그러니까 홍어의 산지는 흑산도, 삭힌 홍어의 산지는 영산포인 게다. 영산포구는 유통의 중심에서 퇴역했지만 영산포 홍어는 여전한 현역이고 인기는 전국적이다.

홍어거리 뒷골목에는 ‘죽전거리’가 있다. 죽집이 늘어서 있던 거리다. 영산포 사람들은 늘 땔감이 부족했다. 그래서 장날이면 나뭇단을 진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들은 이 죽전거리에서 허기를 채웠다고 한다. 지금 죽전거리에 죽집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거리는 텅 비었으며, 빈 집도 여럿 보인다. 옛날 영산포 오일장은 엄청나게 컸다. 지금도 영산포 버스터미널 인근에서 5일장이 열린다. ‘영산포 풍물시장’이라는 이름의 작은 규모다.

홍어거리와 죽전거리를 포함해 영산포의 영향권에 속하는 마을은 이창동과 영산동이다. 한 몸처럼 자리해 쉽게 영산포 마을이라 해도 좋겠다. 일제시대 이 일대는 소위 ‘재패니즈 타운’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거리를 원정(元町)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옛 분위기가 남아 있다. 미로 같은 골목 속에 낡고 허름한 일본풍 건물이 군데군데 보인다. 일본인 대지주였던 구로즈미 이타로의 저택도 남아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한 곳이 바로 영산포 마을이다. 뱃길이 끊기면서 상권은 죽었다. 그리고 1989년 여름의 대홍수, 그 무지막지한 비에 저지대의 집들은 모두 휩쓸렸다. 젊은이들은 대처로 떠났고, 그 많던 적산가옥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1927년 이 일대는 영산포읍이었다. 영산포는 나주보다 목소리가 컸다. 나주와 영산포의 통합 논의가 있었을 때 ‘영라시’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군부독재시절이었던 1981년, 시로 승격된 도시의 이름은 나주도 영산포도 아닌 금성시였다. 금성은 통일신라시대 나주의 지명이다. 영산포는 한동안 ‘금성의 남쪽, 남금성’으로 불렸다. 1986년 금성시는 다시 나주시가 되었다. 지금 영산포라는 행정지명은 없다. 영산포라는 실재는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광주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방향으로 간다. 동광주 직전 문흥 분기점에서 나주방향으로 가면 된다. 나주대교 건너자마자 좌회전해 5㎞ 정도 가면 영산대교다. 영산대교를 건너 바로 우회전하면 곧 ‘영산포 홍어의 거리’가 나오고 영산강가로 나가면 옛 영산포구다. 영산포 황포돛배는 3인 이상 시 운항한다. 자전거도 실을 수 있다. 요금은 성인 8천원, 청소년 6천원, 노인과 어린이 4천원, 자전거 운반료는 대당 1천원이다. 승선 시 신분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월요일은 운항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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