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3·5·10, 그리고 430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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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01   |  발행일 2017-02-01 제31면   |  수정 2017-02-01
[영남시론] 3·5·10, 그리고 430억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밥값 3만원, 선물 5만원, 부조 10만원. 이 기준을 초과하여 직무와 연관된 대접을 받을 경우 뇌물·향응 혐의로 처벌하여 깨끗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김영란법의 취지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됨으로써 우리 사회가 정말 깨끗해질 것이라 믿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이거나 10년 이상 외국을 떠돌다 막 국내에 들어온 사람이다.

청와대에 의해 부패 언론인으로 찍혀 중앙 일간지의 주필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언론인이 기업으로부터 받은 뇌물·향응 액수는 1억원에 이른다. 당사자는 자신이 저지른 비리에 대한 반성은커녕 언론탄압이라고 바락 소리를 내질렀지만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는 것만도 엄청난 특혜다. 지역사회에서 영세기업과 관청을 떠돌며 기십만원의 푼돈을 뜯어먹고 사는 사이비기자들을 법원은 어김없이 구속한다. 시간에 쫓겨 실수로 2천400원 입금을 누락시킨 버스기사의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법원. 그런데 정권 실세에게 430억원을 건넨 재벌에게는 “다툼의 여지”가 있고, “주거와 생활환경을 고려한다”면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다툼의 여지가 없는 재판이 있나? 내가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범죄자도 형량의 다툼이 있으니 재판을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전관들이 큰돈을 버는 것 아닌가. 입시부정을 저지른 대학의 보직교수들은 모두 우중충한 빛깔의 수의를 입고 있는데, 정작 보직 임명권자이자 최종 결재자인 총장은 화사한 옷차림으로 집에 되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이 나라 법원이다.

지난달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또 사망했다. 그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만 32명째다. 보상과 관련된 소송에서 법원은 번번이 기업 편에 섰다. 그래서 그들의 산재보상은 끝도 없이 미뤄지고 있다. 그런데 대법원은 지난해 백혈병을 앓다 사망한 판사의 유족이 제기한 재판에서 백혈병이 업무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최종 판결했다. 판사들이 만지는 문서에 백혈병 유발물질이 섞여 있다고 의학교과서를 뜯어고쳐야 할 판이다.

자신의 운전기사를 폭행하며 온갖 패악한 짓을 일삼던 재벌 3세에게는 하루 저녁 그들의 술값도 안 되는 300만원의 벌금형을, 파업을 한 노동자들을 겨냥한 기업의 손배소에서는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의 손해배상금을 물리는 판사들이 사법정의를 입에 물고 산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문화예술인들의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하여 전현직 장차관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 수사를 받고 있는데, 또 다른 법원에서는 케케묵은 금서리스트에 포함된 책을 온라인에 유포했다는 이유로 전자도서관 대표를 구속했다.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없는 나라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란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특검의 잣대를 대면 누가 구속되어야 할까.

현관들의 협조 없이 전관들의 축재가 어떻게 가능할까. 탈세·횡령·배임과 같은 경제사범은 왜 형의 집행을 항상 유예받을 수 있을까. 경제에 이바지한 공로가 커서?

김기춘 실장 같은 거물들의 판결문은 법의 문외한인 내가 쓸 수 있을 정도로 공식화되어 있다. “…하여 중벌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나, 수십 년간 공직자로서 국가에 봉사해온 점, 그 기간 동안 비리로 처벌받은 적이 없는 점, 동종의 전과가 없는 점,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고령에다 주거 및 생활환경을 고려할 때 수감생활을 견뎌내기 어려운 점 등을 고려하여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430억원 뇌물혐의에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법원은 여론재판으로 자칫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금 사법부가 할 일은 국민여론에 저항할 것이 아니라 권력과 금력에 굴종해온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고, 권력과 금력으로부터 독립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일이다. 사방에서 “이게 나라냐”라는 소리가 터져 나오게 된 데는 김영란법과 같은 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거악에 관대했던 사법부의 책임이 더 무겁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고 했다. 사법부의 운명이 달려있는 말이다.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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