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야야, 누굴 찍으까’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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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03   |  발행일 2017-02-03 제23면   |  수정 2017-02-03
[조정래 칼럼] ‘야야, 누굴 찍으까’

그예,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렇지 싶어 설 전에 칼럼 ‘정담(政談)’을 통해 연휴 동안 가족 간 정치 얘기를 조심하라고 예보를 했는데 아뿔싸, 그 적은 바로 우리 집 내부에 있었다. 속칭 ‘정부미’ 공무원 동생과 ‘일반미’ 동생 사이, 좌와 우로 나뉘어 보수 골통이니 좌빨이니 흑백과 진영의 이념 쟁투를 벌이더니, 결국은 감정싸움으로 골을 팼다. 중간에 말허리를 끊고 중재를 했지만 둘 사이의 서먹서먹함은 상당 시간 지속됐고, 아래 동생이 먼저 처가 나들이를 가고 나자 손위 동생이 ‘너무 몰아붙인 것 같다’며 자아비판을 한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항상 늦은 법. 두 사람 다 오십보 백보, 리더로서 자격 없기는 마찬가지다. 소통 부족과 대화 기술 결여, 실패했던 정부들의 데자뷔는 지금 여기, 도처에 있다.

대통령 감으로 누가 제일 낫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누가 좋으까.’ 이런 조언을, 주로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단도직입적으로 구한다. 지난 설 연휴 정치적 논쟁은 격했지만 지지 후보는 아직 수면 아래 있었다. 자식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찍겠다는 어머니만 부동표(不動票)였다. 조기대선이 된다면 시간이 얼마 없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듯 검증은 차분하게 해야 한다.

‘XXX’만 아니면 누가 돼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도 부쩍 눈에 띈다. 실명을 명기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는 소위 대세론의 주인공이지만 중도·보수층의 신뢰는 미지수다. 대세론은 위기론에 자리를 내줄 수도 있다. 표의 확장성을 상실하면 또다시 대권주자로 만족해야 한다. 이처럼 본선 경쟁력을 의심받는다면 자칫 집안에서도 내쳐질 수 있다. 표심이 밴드 왜건 효과에 편승하게 되면 거스를 수 없는 역풍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부자 몸 조심 한답시고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는 모습이 자주 읽히고, 외교·안보관이 아리송하다는 의심을 종종 받는다. 이러한 의구심에 제대로 답하지 않고서는 그의 대세론도 신기루로 끝나기 십상이다.

‘반문’ 연대는 ‘친문’에서 나왔다. 같은 깍지 속의 콩들인 건 부인하기 어렵다. ‘단일 보수후보론’도 이와 다르지 않다. 홀로 서지 못하고, 오로지 이기기 위한 연대라면 그 또한 패거리 파당일 게 틀림없으니, 스스로를 적폐의 청산 대상에 올리는 형용모순이다. ‘18원 후원금’과 문자폭탄을 동원한 SNS 폭력은 상대를 밟아 죽이고 자기의 삶을 획책하는 패권주의의 발로다. 열렬한 지지자들의 지나친 충성도는 후보의 정신과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마약이자 자해행위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자기 편과 진영에 대한 두둔, 즉 ‘뭐가 문제냐’는 안이한 태도다. 패권(覇權)과 진영, 이념과 프레임에 갇혀서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설령 당선되더라도 반쪽 또는 3분의 1쪽 지도자의 전철을 밟을 게 뻔하다.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면 차라리 도태되는 게 국리민복에 이롭다. 후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세력들 혹은 십상시들을 봐야 하는 이유는 이번 정권에서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았다.

더더욱 우려스러운 건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이 정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 침투하게 된 것. 정당 간 정치적 공방이 시나브로 가족 간의 정투(政鬪)로 옮아 붙었는데, 정작 본인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앵무새처럼 되뇌이기만 한다. 상대의 얘기엔 귀 닫고 끝까지 자기 말만 한다. 차라리 거울 보고 혼자 다투는 게 유익할 것 같다. 대화의 실종 현장은 곳곳에서 목격되고, 심지어 한 좌중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하는 기막힌 코미디마저 연출된다. 세계적으로 최고 성격이 급하다는 우리나라 사람의 성정 탓으로 치부하기엔 석연찮은 불통의 상징이다.

‘정치 교체’를 부르짖으며 출사표를 던졌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자기 교체’를 선언했다. 상대를 개혁하기 이전에 자기 혁신을 통한 권력의지가 없는 대권후보들이 수두룩하다. 건강한 인간성, 배제가 아니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할 사람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정치적 선동과 대중적 집단 광기에 전염된 대선정국, 소통과 연대의 리더십을 갖추고 ‘세대’가 아니라 ‘세계’를 교체할 후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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