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부산 초량 이바구길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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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03   |  발행일 2017-02-03 제36면   |  수정 2017-02-03
골목 접어들자 140여년 마을 옛이야기 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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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계단과 함께 오르내리는 모노레일. 좁은 하늘을 뚫고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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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계단. 초량동 산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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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창고 터에 남은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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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하우스로 쓰이는 ‘이바구 충전소’. 동네 어르신들이 운영하며 수익금은 모두 어르신들에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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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가파른 골목길이 시작된다. 모퉁이 돌면 ‘담장갤러리’다.

일직선으로 올라가는 여행이다. 오르막과 계단의 연속이다. 돌아보면 사람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극장처럼 느껴진다. 오르내리며 단련된 근력들이 불끈 길을 조인다. 그 곁으로 풀어헤쳐진 실타래 같은 골목들이 가뭇없다. 부산역 앞 언덕진 마을 초량. 북쪽의 구덕산 자락이 급하게 흘러 바다까지 닿는 땅이다. 거기에 부산 개항 이후 오늘까지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가파른 길이 있다. ‘초량 이바구길’이다.

‘오르막·계단의 연속’ 부산역 앞 길목
옛 백제병원과 남선창고·초량교회 등
골목마다 개항후 지금까지 시간 흔적
168계단·산복路 ‘멈춰서는 곳이 전망대’


◆초량이야기

초량(草粱). ‘풀밭의 길목’이라는 뜻이다. 부산항과 부산역 일대가 모두 부산 동구 초량동이다. 풀밭이 많았던 곳이고, 6·25전쟁 때만 해도 산기슭에는 초량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초량은 아주 오래전부터 길목과 나루의 성격을 지닌 교통의 요지였다. 경부선의 종착역인 부산역과 해상 교통의 근원지인 중앙부두가 세워진 이후 풀밭에는 도시의 시설물들이 들어섰다. 산의 배를 갈라 도로를 냈고 그 사이 조밥 같은 집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무수한 길이 생겼다. 초량은 조선시대의 ‘왜관(倭館)’ 터로 보다 익숙하게 상기되는 이름이지만, 부산 개항 이후는 보다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광복 후 피란민들의 터였던 1950~60년대, 산업 부흥기였던 1970~80년대 부산의 모습이 그 길에 고스란하다. ‘초량 이바구길’은 그 고스란한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

‘초량 이바구길’은 부산역 앞길을 건너자마자 시작된다. 식당, 술집, 여관 등이 어지러이 빼곡한 길을 100m쯤 오르자 모더니즘 양식의 건물이 눈에 확 띈다. 1922년 김해 사람 최용해가 지은 옛 백제병원이다. 부산 최초의 근대 병원으로 승승장구하다 행려병자들의 인체표본을 전시했다는 이유로 환자가 뚝 끊겼고, 결국 주인은 야반도주했다. 이후 ‘봉래각’이라는 중국 요릿집이었다가 일본인 장교 숙소, 예식장 등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근대 건축물로 지정되어 있다.

병원 뒤쪽에 자리한 커다란 마트는 부산 최초의 물류창고였던 남선창고가 있던 자리다. 함경도산 명태를 보관했던 창고로 명태고방이라고도 불렸다. 수영성 관아 건물을 뜯어 나무기둥을 세우고 붉은 벽돌로 벽을 두른 커다란 건물이었다 한다. 건물은 사라지고 지금은 한쪽 벽만이 옛 터를 기억하며 서있다. 촘촘한 붉은 벽돌에 명태 냄새가 배어 있는 듯하다.

좁다란 골목이 시작된다. 길은 한 아름의 나무처럼 상승하고, 손닿는 벽면마다 초량의 옛 이야기 가득하다. 옛 초량의 사진과 시인 강영환의 글이 어우러진 ‘담장갤러리’다. 골목이 툭 터지며 눈앞에 초량초등학교와 초량교회가 나란하다. 초량교회는 1892년에 세워진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다. 신사참배에 항거했던 주기철 목사가 한때 목회하던 곳이기도 하다. 초량초등학교 담장은 ‘이바구 갤러리’다. 장기려 박사, 연출가 이윤택, 시인 유치환, 가수 나훈아, 개그맨 이경규, 음악감독 박칼린, 그리고 몇몇 정치가 등 동구 출신의 인물들을 만난다.

◆168 계단

골목 모퉁이에 오래된 기다림처럼 건물이 서있다. 다방이었거나 선술집, 어쩌면 경양식 집이었을 것 같은 모습이다. 지금은 작은 밥집인 ‘168도시락국’이다. 메뉴는 시락국밥, 소고기국밥, 도시락, 그리고 커피와 율무차 따위의 몇몇 차 종류가 전부다. 꼬부랑 할머니와 근엄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일하신다. 동구청에서 운영을 맡긴 지역의 어르신들이다. 어딘가 닮아 모녀일까 했는데 아니란다. 꽁꽁 언 몸을 뜨거운 국으로 녹인다. 집밥처럼 그리운 맛이다.

식당 앞에서 몇 걸음, 까마득한 계단을 맞닥뜨린다. 168개의 계단. 경사 45도에 총 길이 40m에 달하는 아찔한 길이다. 계단 왼쪽에는 우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모노레일 승강장이 있다. 계단과 나란히 오르내리는 모노레일은 지난해 6월 정식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볼까. 가파른 공포를 등에 지고 오른다. 초량동의 산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연결하는 유일한 길,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산복도로 사람들은 양철통에 물을 긷고 168계단을 올랐다. 일당 노동자들은 뱃고동이 울리면 일감을 쫓아 단걸음에 뛰어 내려왔다. 아이들도 노인들도, 어느 밤 술에 취해 흔들리는 가장도 이 계단을 올랐을 게다.

30계단을 오르면 ‘김민부 전망대’다. 김민부는 15세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천재시인으로 대표작 ‘기다리는 마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가 가슴께에 고인다. 바람이 차다. 계단은 멈춰서는 곳이 모두 전망대다.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초량 이바구길’을 걷는다.

◆산복도로에서

산복도로에 오른다. 모노레일 정거장의 지붕은 하늘로 나아간 잔교 모양의 전망대다. 계단 끝 도로변에는 ‘이바구 공작소’가 있다. 누구나 부담 없이 들렀다 갈 수 있는 지역 역사관이자 여행자들의 쉼터다. 광복부터 베트남전 파병까지의 역사와 산복도로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벽면 가득하다. 맞은편에는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는 ‘이바구 충전소’가 자리한다. 산복도로 따라 조금 더 가면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 박사의 기념관이 있다. 가난했던 시절 약 대신 ‘닭 두 마리’라는 박사의 처방전은 마음을 울리는 유명한 일화다.

산복도로는 모두가 전망대다. 먼 바다 왼쪽에 북항대교, 오른쪽에 남항대교가 영도에 어깨를 걸치고 있다. 저 아래 부산역과 그 뒤로 한창 공사 중인 벌건 땅이 보인다.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북항 재개발’ 사업과 ‘창조경제플랫폼 구축’ 사업의 현장이다. 점진적인 매립으로 바다는 많이 후퇴했다 한다. 어디까지가 바다였을까. 바다는 점점 멀어지고, 이제는 뱃고동 소리에 뛰어 내려가는 이 없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부산역에 내려 역 앞 횡단보도 건너 오른쪽으로 60여m 가면 ‘초량 이바구길’ 입구가 있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지만 작아서 잘 찾아야 한다. 모노레일은 공짜다. 중간 정거장도 있다. 산복도로 따라 계속 가면 정점인 망양로다. 부산역을 오가는 333번 버스가 다니는 이 언덕에 ‘유치환의 우체통’이라고 이름 붙인 카페와 전망대가 있다. 초량 이바구길은 약 1.5㎞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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