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충남 태안 학암포∼신두리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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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0   |  발행일 2017-02-10 제37면   |  수정 2017-02-10
푹신한 백사장 걷노라니 사막의 낙타마냥 고개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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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동해변의 아름다운 풍경. 거북바위와 그 위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겨울바다 서해는 꿈길처럼 자욱하다. 해변의 사구에 갈대군락이 의미 있게 자생하는, 그 겨울의 서해는 시처럼 아름답다. 학암포 해안 들목은 선승의 반쯤 감긴 눈처럼 적요하다. 사방은 모래로 덮여 있다. 밀가루 같이 부드러운 모래가 발에 감미로운 감촉을 준다. 마치 융단 위를 걷는 것 같다. ‘여기는 1코스 바라길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아치형 문을 지난다. 바다의 고어인 아라에서 바라의 명칭이 생겼다. 그 상큼한 곰솔의 향이 겨울임에도 산뜻한, 숲 속을 걷는다.

바다는 지척에서 명상에 빠져 있다. 번뇌가 번뇌를 지우는, 그 고요하고 긴 숨의 바다는, 마음의 흐름을 바꾸게 한다. 나의 삶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새로운 흐름이 저 학암포에는 있다. 물때가 맞으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소분점도가 점차 멀어진다.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지나가고 사라진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경치도 지나가고 사라진다. 이렇게 시간의 순간성을 자각할 수 있는 이 길이, 정박된 마음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점화의 길이다. 무언가 열망하다가 지쳐버린 마음, 어떤 것도 막장에 가면 항상 무(無)라는 상실과 허무의 마음을 뒤집는 파도와 바람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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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포 해안바다의 비경. 7개 뱅이가 붙은 섬들이 아련하게 보인다.

조붓한 숲길을 벗어나자 구례포 전망쉼터가 나온다. 이름 모를 소녀의 흰 목덜미 같은 우아하고 가녀린 해변을 보며, 그리고 백사장을 걷고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보며, 문득 사랑을 생각한다. 가슴을 태우는 감정이 울컥 올라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나. 자탄한다. 해안의 갯바위로 나간다. 우리나라에서 독도 다음으로 물이 맑다는 구례포다. 서해에 이렇게 맑은 바다가 있다니, 약간은 의아하다. 맑디맑은 물은 어린아이의 눈망울처럼 순수하고 반짝인다. 아이의 눈은 신을 볼 수 있는 눈이다. 하얀 조개껍데기가 해변에 몇 겹의 띠를 만든 모래 위를 걷는다. 구례포는 드라마 ‘용의 눈물’ 등의 촬영지다. 곰솔 숲이 성숙한 미를 풍긴다.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 양편으로는 먼동 해변과 마외 해변이 푸른 바다를 감싸고 있어 포근하면서 고즈넉하다. 해변에서 바라보면 대뱅이, 굴뚝뱅이, 거먹뱅이, 수리뱅이, 돌뱅이, 질마뱅이, 새뱅이라는 재미있는 옛말 이름을 가진 크고 작은 섬 일곱 개를 볼 수 있다. 해변은 바람에 의한 모래 유실을 막기 위해 포집기를 설치했다. 이것마저도 무슨 설치예술처럼 아름답다. 해안 데크길과 이어지는, 교통약자들도 걸을 수 있도록 휠체어 구간을 따로 조성해 놓았다. 그래서 구례포 천사 길로 부른다. 해변길이 다하자 역시 곰솔이 우거진 작은 언덕이 나온다. 비록 언덕이라 하나, 역시 바다를 보며 걷는 멍해지도록 좋은 길이다.


바다까지 곰솔香 번지는 학암포가 들목
숲길 벗어나자 패총 가득 구례포 해변
대·굴뚝·돌 등 7개 ‘-뱅이’ 섬 한눈에

바다와 이마 맞댄 먼동의 거북바위 눈길
능파사 법당의 등 맞댄 두 좌불상 이색
韓최대 해안사구 신두리‘모래 마법세상’



◆먼동해안에서 능파사까지

발걸음이 가벼워서인지 곧 먼동해변에 닿는다. 바닷가에 드라마 먼동의 여주인공 이름을 딴 하희라 소나무가 보인다. 기암괴석 위에 분재처럼 보기 좋은 소나무다. 바다를 중심으로 암매, 마외, 정자두, 구름포, 거북바위가 나타난다. 환선형의 리아스식 해안이 절경을 이룬다. 1993년 KBS 대하드라마 ‘먼동’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이곳 지명도 과거 암매라고 불렀으나, 이 드라마의 제목을 따서 2009년 먼동해변이 되었다. 이곳은 또 드라마 ‘야망의 전설’ ‘불멸의 이순신’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그만큼 드라마 촬영에 환경과 여건이 좋은 곳이다. 역시 먼동해변은 감독들의 눈높이에 맞는 숨은 비경이다. 겨울 바다가 그리운 날 찾을 수 있는 멋진 해변이다. 거북바위까지 간다. 여기서 해녀의 집도 보인다. 해안선 따라 가다가 바다와 언덕이 이마를 맞대어 있는 곳에, 해녀들은 어디로 떠나고, 빈집이 해녀의 잠수복처럼 덩그렇게 남았다. 바다와 살을 맞대고 평생 물질로 살아가는 해녀들, 이 겨울 해녀들은 다른 바다로 가서 어떤 꿈을 건지고 있을까.

돌아 나와 백사장을 걷는다. 모래가 얼마나 푹신한지, 사막을 걷는 쌍봉낙타의 머리처럼 고개가 끄덕여진다. 파도는 쉬지 않고 밀려오고 가면서, 나를 비틀고 건드린다. 아름답고 무의미한 저 반복이 슬프다. 종내에는 저 파도가 내 마음까지 밀려와 철썩인다. 흰 포말이 부서질 때마다 나의 몸은 흰 포말이 되어 부서진다. 그리고 다시 바닷물이 되어 저 바다로 흘러가는 나의 의식을 느낀다. 저 바다와 파도에는 신(神)이 쥐여주는 행복이 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바다와 같은 빛깔인 파란 눈을 가진 노인은 자신을 무섭게 끌어당기는 청새치의 괴력과 대결한다. 자칫 죽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노인은 자신의 행복이 그곳에 있으므로 청새치와 싸운다. 죽음을 기다린다면, 그것은 죽음에 먹혀버리는 것이고, 따라서 힘은 사라진다. 먼 바다로 나가 며칠 동안 피로와 고독, 끝없이 덮치는 공포와 싸우면서 낚싯줄을 놓지 않는다. 그것에서 노인은 가장 완벽한 행복과 죽음을 건너가는 진정한 힘을 알게 된다. 니체는 행복을 “힘이 증가된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기쁨을 말한다”고 했다. 바다에는 저항을 넘을 수 있는 무한한 힘이 있다.

다시 해송숲길이 나온다. 작은 둔덕에 우거진 나무는 바다의 연속선 위에 있는 듯하다. 바람이 불면, 우듬지는 물결무늬로 흔들린다. 그 환상적인 곰솔 숲에 전망대가 있다. 정자두, 신너루 해변, 태배전망대, 지나온 먼동 해수욕장이 조망된다. 능파사에 도착한다. 법당의 부처님은 양좌불이다. 바다를 응시하는 부처님, 절 마당을 응시하는 부처님이 등을 맞대고 있는 양좌불이다. 인간에서 무상정등정각의 부처님이 되신 석가의 깨달음은 대체 무엇일까. 승찬대사의 신심명에 보면, 단막증애(但莫憎愛)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 말하자면, 사랑과 미움을 하지 않으면 환하게 명백해진다는 것이 세존이 깨달은 핵심이다. 저 부처님을 쳐다보는 한순간만이라도 단막증애 통연명백을 자각하면 좋겠다. 이제부터는 작은 언덕을 넘어간다. 정자두 들머리를 지나고, 이 코스의 황금으로 여겨지는 곰솔 숲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오존 공기를 마시며, 행복이라는 단어를 이해한다. 드디어 신두리 해안사구가 보인다. 해안제방에도 곰솔을 심어 걷기에 너무 좋다. 바다는 더 가까이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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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아름다운 신두리 해안바다, 건너편 산야가 아스라한 박무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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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리 해안 사구 내에 있는 사초군락과 트레킹 로드.

◆신두리 해안사구

바람이 불 때마다 지형이 변하는 신두리는 ‘바람의 땅’이다. 서해를 건너온 매서운 바닷바람이 파도에 밀려온 곱디고운 모래를 육지로 실어 나른다. 아득한 태곳적 바람이 불 때부터 한 줌씩 쌓여온 모래가 언덕이 되고 성이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약하게 강하게 움직이는 바람이 모래 언덕을 캔버스 삼아 물결무늬의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한다. 우리나라 최대 해안사구로 ‘한국의 사막’이라 불리는 이색 풍경이 이곳이다. 2001년 11월30일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됐다. 사구에는 해당화, 갯메꽃, 갯완두, 갯방풍, 갯그렁, 갯쇠보리, 산조풀, 통보리사초, 순비기나무가 자란다. 이들 이름을 읊조리면 하나의 낭송시다.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에는 금개구리, 왕소똥구리, 개미지옥, 조롱박먼지벌레, 유혈목이, 무자치, 표범 장지 뱀, 해오라기, 꼬마물떼새, 황조롱이, 쇠기러기가 보금자리를 틀고 살아간다. 이 이름을 부르면 거기에 신의 음성이 섞여 있는 것을 안다. 고라니, 멧토끼, 삵도 살고 있다.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의 ‘듄45’를 닮은 모래 언덕과 언덕마다 어김없이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다. 인간의 흔적은 매 시간 없어지고 거기에 영원한 신의 솜씨만 남아있는 마법의 신두리 사구다.


☞ 여행정보

▶트레킹코스: 학암포 해안-구례포 해안-먼동해안 - 능파사- 신두리 사구 - 신두리 주차장

▶내비게이션 주소: 충남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 515-183 미락가든 (041)674-5855

▶주위 볼거리: 두웅습지, 흥주사 3층 석탑·은행나무, 천리포 수목원, 소근진성, 옥파 이종일 선생 생가지,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 청산수목원

▶문의: 충남 태안군 태안읍 군청로 1 (041)670- 2692


글=김찬일<시인·대구문협 이사>
사진=김석<대구힐링트레킹 사무국장> kc12taeg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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