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4·<끝>] 예천 금당실마을 ‘대중이발관’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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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5   |  발행일 2017-02-15 제29면   |  수정 2017-02-15
열여섯 살에 시작 58년 경력…시골마을 老이발사는 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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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마을 대중이발관. 누렇게 빛바래고 벗겨진 페인트칠 위에 ‘대중이발관’이란 글씨가 쓰여있다. 작은 사진은 박용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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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발관 내부의 낡은 이발의자. 30년 이상 박씨의 이발소만을 고집하는 단골이 많다.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마을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발소 한 곳이 영업 중이다. 상호는 ‘대중이발관’이다. 기자는 종종 지나치며 보았던 시골마을의 낡은 이발소가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진중하다. 박용직 이발사(74)다. 박씨는 “평생 동안 이발 외길을 걸어왔다”고 말했다.


이발 의자 3개 놓인 소박한 이발관
면도칼 날 고르는 가죽피대도 남아

“기술인 되라는 부친 조언따라 외길
농촌인구 줄어 손님 수 예전만 못해
경력 60년 채우고 더 일하는게 목표”



#1.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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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발관 거울 아래에 가죽 피대가 달려 있다. 가죽 피대는 숫돌에 면도칼을 간 다음 날을 고르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다.

전화통화 후 인터뷰를 위해 금당실마을에 도착했다. 이발소는 시장 초입에 위치해 있다. 누렇게 빛바래고 벗겨진 페인트칠 위에 ‘대중이발관’이란 글씨가 쓰여있다. 설렘을 안고 이발관 내부로 들어갔다. 박씨는 마침 이발 중이다. 이발의자 3개가 놓인 이발관은 소박하다. 낡은 수납장과 거울, 타일로 마감한 개수대가 보인다. 벽면 한쪽에는 판매용 담배가 진열돼 있다. 또다른 벽면 앞에는 낡은 브라운관 TV가 놓여있고, 그 위에는 커다란 숫자가 적힌 달력이 걸려있다.

거울 아래에 달린 가죽 피대를 보니 진짜 이발소라는 느낌이 든다. 가죽 피대는 숫돌에 면도칼을 간 다음 날을 고르게 하기 위해 사용했지만, 현재는 위생상 일회용 면도날을 사용한다. 이발관의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는 이발관의 역사를 보여준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손님이 걸터앉아, 엉덩이 닿는 부분이 반들반들 하다. 개업 때 마을 목수가 소나무로 만들어준 것이다. 질곡의 세월을 관통한 의자는 이발사와 함께 여전히 현역이다.

출입문 옆 헝겊소파에 앉아 이발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박씨는 리듬감 있게 가위질 한다. 나이 지긋한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긴 것이 미안해서일까? 이발을 마친 손님이 면도와 샴푸는 집에 가서 한단다. 박씨는 “머리카락 떨어져 안 된다”며 기어이 머리를 감아준다. 박씨는 헤어드라이어로 손님의 머리카락을 말리고 나서야 손님을 배웅한다. 갑자기 이발관 문이 열리고 어린아이들이 박씨 품으로 뛰어들어 안긴다. 주말을 맞아 서울에서 내려왔다가 작별인사를 하러 온 손자들이다. 피붙이를 보듬는 박씨의 모습은 여느 할아버지와 다름없다.

#2. 아버지의 조언으로 이발사가 되다

기자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부탁했지만, 박씨는 “별로 할 말이 없다”고 답했다. 기자가 거듭 채근하자 박씨는 조용조용히 말문을 연다.

“저는 1943년 금당실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부친은 면사무소 공무원이었죠.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 6·25전쟁이 터졌는데, 당시 우리마을도 폭격을 당했습니다. 마을 앞 백마산에서 전투가 벌어져 불꽃이 튀는 것까지 봤습니다. 그걸 일부러 구경하러 다녔어요. 철없는 시절이었죠. 우리 가족은 인근 마을의 고모댁으로 피란을 갔습니다.” 전쟁의 기억을 더듬는 순간, 박씨는 어머니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전쟁통에 지병을 앓던 박씨의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박씨는 어린 나이에 이발을 시작했다. 이발을 배워 기술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예천 대창중을 졸업한 박씨는 곧바로 고향을 떠난다. 서울에 있는 한미종합고등기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1년 과정의 이발 이론과 실습을 공부하고 자격증을 땄다. “서울에서 학교 다닐 적에 4·19가 일어났는데 날마다 데모 구경을 했습니다. 학생들이 합승버스를 빼앗아 타고서는 손을 흔들던 것이 기억나네요. 당시 머리카락이 짧은 ‘빡빡머리’ 중·고등학생들이 머리카락을 기르게 해 달라며 거리 행진을 하는 것도 봤습니다. 저는 이발학교 학생이어서 ‘밑도리(스포츠 머리스타일)’를 하고 있었는데 꽤 부러움을 받았지요.”

박씨는 기술학교 졸업 후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의 이발관에 취직했지만, 그의 서울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이 한반도를 덮쳐 큰 피해를 남겼고 고향인 예천도 예외는 아니었다. 졸업 후 예천 금당실로 돌아온 박씨는 그 길로 고향에 눌러앉았다. 당시 마을에 있던 신흥이발관에 취직했다. 1년 일하다 박씨의 아버지가 차려준 이발관을 도맡는다. 이후 23세에 입대한 박씨는 군대에서도 이발병으로 복무했다. 27세때 제대한 박씨는 그해 평생의 반려자인 김신자씨(72)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부는 택시를 타고 처갓집으로 가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했다.

박씨는 이발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이발에 대한 열정이 커지고 있다. 농촌인구 감소로 손님 수는 예전같지 않지만, 30년 이상 박씨의 이발소만을 고집하는 단골이 많다. 이발소가 위치한 용문면뿐만 아니라 인근 감천·하리·유천면에서도 박씨의 이발기술을 믿고 찾는 이들이 많다.

#3. 이발사는 나의 천직

박씨는 한때 서실에 다녔다. 대한민국 유림서예대전에서 입선할 정도로 실력을 닦았지만, 여전히 남 앞에서 글을 쓰는 것은 쑥스럽다. 그래도 매년 봄 입춘방(立春榜)만큼은 빠짐없이 써 붙인다.

빛바랜 가족사진에는 애틋한 가족애도 묻어나 있다. 박씨의 형, 누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위에는 ‘기해(己亥)의 춘몽(春夢), 삼남매(三男妹)’라고 또렷이 적혀 있다. “중학교 시절 1시간 넘는 거리를 걸어와 도시락을 전해주던 누님이 생각납니다. 초라한 도시락 반찬이 부끄러웠던 서글픈 시절이었지만 살다보니 좋은 날도 왔네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이발 일을 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씨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힘들었지만) 이발사가 되길 잘한 것 같습니다. 여태껏 이발기술로 먹고살았고, 4남매 대학 공부를 다 시켰으니….”

박씨는 고령임에도 자신이 현역인 것이 자랑스럽다. 박씨는 “앞으로도 계속 이발사의 길을 가고 싶다. 이발사 경력으로 60년을 채우고 더 일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시골마을의 평범한 이발사는 격변의 시대에도 우직하게 외길을 걸어왔다.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지만, 한국 현대사의 나이테가 그의 인생에도 스며있었다.

글·사진=서미숙<경북 스토리 기자단> doragiseo@hanmail.net

공동기획 : 문화체육관광부·한국콘텐츠진흥원·경상북도·경상북도문화콘텐츠진흥원·경북 스토리랩·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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