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날(生)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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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20 07:57  |  수정 2017-02-20 07:57  |  발행일 2017-02-20 제18면
[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날(生) 이미지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제재소 앞을 지날 때 죽은 나무가 뿜어내는 향기에 몸서리친다. 죽은 나무의 혈액이 아침에 넘기는 책장에 묻어 있다. 나는 본다. 은폐된 봄의 이미지, 맹렬하게 돌아가는 전기톱과 완강하게 통나무를 밀어넣는 사내들의 말없는 노동, 줄지어 기다리는 야적장의 나무들을. 절단된 꿈의 비명들이 톱밥처럼 흩어지는 봄날. 억압된 충동들이 켜켜이 잘리어져 우리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소하게 변형되고 있는 것을. (…) 라디오에서는 종일 뇌사에 관한 논쟁이 격렬하다. 한 죽음이 오랜 세월 동안 종료될 수 없음을 본다. 이 봄날’ (-권운지, ‘봄에 쓰는 시’)

‘내실의 쥐똥나무가 수상하다. 명확한 확증의 단서를 잡지 못한 채, 오늘 비로소 우수를 보내고, 절제된 가지의 긴긴 침묵 위로 더디게 다가오는 적소(謫所)의 봄, 겹겹으로 에워싼 감시망을 뚫고, 무엇이 화분의 쥐똥나무를 설레게 하였는지 오늘밤 내가 지켜보고자 한다. 밤이 깊을수록 유혹의 손길은 끊임없고 홀로 버티는 파수꾼의 밤은 곤혹스럽다. 못 미더워, 완강한 철제대문의 문고리를, 거실의 이중창들을, 방으로 통하는 출구의 자물쇠를, 열두 번씩이나 부정해 보는 오늘밤도 첫닭의 울음소리는 목전에 당도하고, 이 완벽한 차단의 담벼락을 뚫고 들어와 두드러진 잎눈마다 봉인의 밀서를 걸어 두고, 무엇이 이 방을 다녀간 것인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권운지, ‘사신(私信)’)

‘가벼운 약속처럼 오다가. 오래된 결심처럼 변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망설임도 없이 저렇게 확실한 획을 내리 긋겠는가. (…) // 시간을 되돌리는 주술의 음악이 종일 몸속의 강물을 풀어낸다. 와 와 소리치며 달려오는 저 비는 어떤 몸을 거쳐 간 강물이다. (…) // 뼛속 깊이 차오르는 비는 시제를 모른다. 한 강물이 또 한 강물과 이어지는 저녁엔 맑은 음악이 될 때까지 깊이깊이 젖는다. 보랏빛 구름의 전생을 따라가면 궁륭 속에 몸을 숨긴 슬픔, 눅눅한 바람은 최초의 우레와 보랏빛의 향기를 기억한다. 절명의 꽃들 살아난다. 흠뻑 젖은 한 사람이 들어온다. 빗속에 오래된 은신처가 있다.’ (-권운지, ‘빗속의 은신처’)

한 톨의 쌀에서 이백 번 넘는 농부의 손길을 느끼듯 모든 사물에는 셀 수 없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글에는 ‘농부의 노고’ 등과 같은 익숙한 이미지보다 ‘우리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소하게 변형’된 또는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은폐된 이미지’들이 많이 묘사되어 있지요. 좋은 예술가란 ‘주술의 음악이 종일 몸속의 강물을 풀어’내는 것을 듣고 느껴 묘사해내는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이들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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