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돈 애국지사 증손녀 서계희씨 “오빠 두 분은 대구에 살고 있어요”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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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21 08:36  |  수정 2017-02-21 08:36  |  발행일 2017-02-21 제28면
국채보상운동 110주년기념 인터뷰
“문화유산 해설사로 활동하고 싶어”
서상돈 애국지사 증손녀 서계희씨 “오빠 두 분은 대구에 살고 있어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서상돈의 증손녀 서계희씨가 집안 내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릴 적 계산동(대구시 중구) 한옥에 살던 추억이 남아있습니다. 집이 엄청 넓었던 것 같아요. 작은 동산이 두어 개 있고 정원과 연못도 있었는데, 커다란 금붕어가 살고 있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110주년 기념일(21일)을 앞두고 지난 17일 서계희씨(60·경산시 진량읍 금박로)가 영남일보를 찾았다. 서씨는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서상돈의 증손녀다. 그의 조부는 서상돈의 아들 병조씨이며 선친은 정학씨다.

서병조는 서상돈의 네 아들(병옥·병조·병주·병민) 중 둘째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는 등 대구의 장직상, 박중양 등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서병조는 3남5녀를 뒀는데, 정학씨는 그중 막내이며, 계희씨는 정학씨의 3남2녀 중 막내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어릴 때 일본 유학을 갔다고 들었습니다. 큰 아버지께서 대륜재단 이사장을 하다 대륜학원을 넘기고 항공사업에 손을 댔다 실패했지요.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사촌들은 거의 다 미국에서 살고 있어요. 어릴 때 헤어져 지금은 소식이 끊겼습니다.”

서씨에 따르면, 선친 정학씨는 대구에 살면서 옛 달성군청 자리에 있던 선산을 팔고 현재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천주교공원묘원으로 서상돈과 서병조의 산소를 이장했다고 한다. 또 서상돈의 옛 사진과 다른 여러 기록물도 선친이 보관하고 있다가 1990년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고 한다.

“지금 증조부(서상돈) 사진은 어릴 때 고택 마루에 걸려있던 사진이에요. 우리집은 아파트(대구시 중구 계산동 미소시티)가 있는 자리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명절 때마다 증조부, 조부, 선친의 묘소가 있는 범물동 천주교공원묘원에 가서 성묘를 합니다.”

일제강점기 계산동에는 대구의 부호들이 살았다. 민족시인 이상화와 그의 백씨인 독립운동가 이상정 장군, 대구 초대상공회의소장이자 서예가 회산 박기돈, 가곡 금잔디의 작곡가 김진균, 월북화가 이쾌대, 영남대 전신 청구대학 설립자 야청 최해청, 죽농 서동균, 이효상 전 국회의장 등이 계산동 출신이다.

서씨는 계산동에서 태어나 중구에서 초·중·고를 나와 효성여대(옛 대구가톨릭대)를 졸업한 뒤 진주로 시집을 갔다 경산으로 와서 20년 넘게 살고 있다.

“대구에 오빠 두 분이 살고 있는데 두 분 다 와병 중입니다. 사촌들도 국내외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어, 대구에는 친척이 별로 없어요. 작은 아버지의 장남인 서공석 신부님(부산 거주)과는 연락이 닿았는데 지금은 몸이 불편하다고 들었습니다.”

서씨는 젊을 때 대구은행 등지에서 일을 하다 지금은 주부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 남편인 탁우강씨(71)는 “아내가 집안일만 하고 바깥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구의 자랑인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선각자의 후손임에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암울했던 시대, 영욕(榮辱)이 교차한 집안 출신이지만 그래도 아내가 대구와 대구시민을 위해 봉사할 일이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서계희씨는 “앞으로 역사공부를 해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나 서상돈 고택 같은 곳에서 문화유산해설 강사로 활동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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