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상> 고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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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21 08:33  |  수정 2017-02-21 08:33  |  발행일 2017-02-21 제29면
어머니가 돌아본 언덕 설화 ‘고모’…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모티브
1925년 간이역 설립∼2006년 폐역
역 오간 사람들과 많은 추억 간직
70년대 전성기…주민 ‘만남의 場’
2014년 대구시 수성구 고모역 전경. 지난해까지 고모역문화관이 운영됐지만, 현재 문을 닫은 채 방치돼 있다, 작은사진은 만촌동 호텔인터불고와 고모역을 잇는 고모령 고갯길. <영남일보 DB>

영남일보는 ‘대구 이야기를 찾아…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번 시리즈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 대구시의 ‘지역 스토리랩 운영 지원 사업’에 따른 ‘대구 스토리랩 운영 사업’의 하나다. 대구 스토리랩은 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이 주관하고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연구원이 참여한다. 시리즈에서는 대구 곳곳에 산재한 역사·문화자원과 다양한 스토리를 발굴하고 소개한다. 발굴한 스토리는 향후 대구만의 특화된 문화콘텐츠로 개발할 수 있는 기반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원고는 대구시민으로 꾸려진 대구 스토리 기자단이 직접 현장을 찾아 취재하고 작성했다.


우리나라 근대기에 지어진 철도역들은 도시와 농촌을 잇는 연결망이면서 물자수송과 소통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대구시 수성구 고모동의 철도역인 고모역도 마찬가지다. 고모역은 1925년 11월1일 간이역으로 설립됐다가 이용객 수가 증가하면서 1931년 보통역으로 승격됐다. 1949년 화재로 불에 탄 고모역은 1957년 새로 지어졌다. 역사 옆 건물은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건물로 근대 철도역의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1. 한때 번성한 철도역

고모역은 1970년대 연간 5만4천여명이 이용하는 곳이었지만, 1977년 이후 화물 운송 감소로 소화물 취급중지명령을 받았다. 이후 고모역의 이용객 수는 감소를 거듭해 2004년에는 여객취급을 중지하고 말았다. 2006년에는 화물 취급중지와 더불어 역무원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되면서 실질적으로 폐역처분된다.

지금은 고모역에서 열차를 이용할 수 없지만, 여전히 고모역은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활기찬 장소로 남아있다. 역이 위치한 고모동 주민들 또한 역과 얽힌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1970년대 고모역과 그 주변은 대구시로 편입되기 전이었다. 행정구역상 경북 경산시에 속했다. 당시 고모역 주변에는 사과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많았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모역의 열차는 주민들이 대구지역 시장을 오가는 중요한 생활교통 수단이었다. 고모동 주민들은 고모역에 서는 완행열차를 이용해 대구시내 번개시장과 칠성시장에 사과를 내다팔러 다니곤 했다. 고모역은 주민들이 서로의 소식을 묻고 정을 나누는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 역을 드나들며 이웃들을 만날 수 있었고, 역 앞은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쉬거나 놀았던 유희의 장소였다.

#2 현인이 부른 ‘비 내리는 고모령’

‘고모’라는 지명에 얽힌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고모역 인근 ‘고모령’에 얽힌 설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고모’는 돌아볼 ‘고(顧)’와 어미 ‘모(母)’라는 글자가 합쳐져 ‘어머니가 돌아본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옛날 이 지역에 어머니와 어린 아들 2명으로 이뤄진 거지가족이 살았다. 어느날 한 스님이 시주를 받기 위해 거지가족을 찾았지만 이들은 너무 가난했고, 시주할 어떤 재물도 없었다. 이에 스님은 거지가족에게 “가난의 까닭은 덕이 부족한 탓이고,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을 남긴다. 이 말을 들은 거지가족은 공덕을 쌓기 위해 탑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가진 것이 없었던 거지가족은 흙으로 산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탑보다 더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다. 세월이 흘러 거지가족은 각자 하나씩 흙산을 완성해가고 있었고, 2명의 아들은 누구의 흙산이 높은지 각자 경쟁하며 따지기 시작했다. 이에 어머니는 아들들의 다툼에 한탄하며 자책했고,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고 집을 떠난다. 그렇게 아들들의 곁을 떠나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아들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이 고모령이라는 것이다. 고모역과 마을을 둘러싼 세 봉우리에 ‘형봉’ ‘제봉’ ‘모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 설화 때문이다.

또한 고모령 설화는 1946년 가수 현인이 부른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의 모티브가 됐다. 이 노래가 널리 알려지면서 대중에게 ‘고모’라는 지명이 익숙해졌다. 1991년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호텔인터불고 입구에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랫말이 적힌 ‘고모령비’가 세워졌으며, ‘비 내리는 고모령’이라는 악극까지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고모동 주민들에 따르면 한때 ‘고모동’을 ‘고무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주민들의 우스갯소리지만, 고모역을 드나들던 기차의 기관사가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고무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고모역 주변이 1970년대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후 쇠퇴의 길을 걸으며 관광지로서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고모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모역 주변을 관광지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고모령비는 2006년 대구시 수성구의 ‘10대 명소’ 중 한 곳으로 지정됐다. 2011년부터는 ‘고모령 효 가요제 및 예술제’도 대구에서 열리고 있다. 2014년 고모역을 가요박물관으로 변경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현재 고모역이나 인근지역을 방문하는 관람객 수는 많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작은 철도역인 고모역이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이했으면 한다. 고모역과 그 주변의 스토리가 널리 알려져 고모동 일원이 유명 관광지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한승희<대구 스토리 기자단> ses19942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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