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혼재된 사실과 광장의 가치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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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22   |  발행일 2017-02-22 제31면   |  수정 2017-02-22
[박재일 칼럼] 혼재된 사실과 광장의 가치

오래전인데 김종훈 전 한미FTA 한국측 수석대표가 대구시청 특강에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 협상 일화를 들려줬다. 미국측이 강한 반박을 해왔다. ‘한국인이 주장하는 광우병 소 논란은 전혀 과학적인 태도가 아니다. 미국인도 기꺼이 먹는데 왜 그런 논란이 일고 있는가. 수입하는 것이 당연하다.’

미국의 압박에 김 전 대표는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른바 2008년 초여름 서울 광화문에서 펼쳐진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사진이다. “당신(미국)은 이것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 자신의 반문에 미국측은 수긍하고, 30개월 미만 소로 수입을 제한하는 일부 성과가 있었다고 부연했다.

김 전 대표의 요지는 외교 협상에 있어서 국내의 거센 반대는 어떤 지점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취지이기도 했다.

‘과학’의 요체는 사실이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사실에 기반하고 논거를 추출해 예측을 한다. 기상청 예보 방식이랄까. 언론도 사실보도를 외친다.

나는 가끔 대학이나 단체에 강연 초청을 받으면 질문을 던진다. “흔히 우리는 사실(fact)을 강하게 내세우는데, 사실의 반대말 혹은 대척적인 말이 무엇입니까.” 거짓이라고 답하기도 하고 혹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실의 반대는 ‘가치(value)’다. 사실은 존재, 즉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다.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한다. 반면 가치는 있어야 할 것들이다. 당위의 세계다. 해야 한다는 ‘must’에 가깝다. 주관의 세계이기도 하다. 확장하면 신념체계(belief system)가 된다.

어쩌면 사실 추구는 과학에 가깝고, 가치 추구는 철학에 접근한다. 두 가지 개념이 100% 구분될 수 있겠는가만, 사고를 발전시키려면 구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한편 ○○○ 후보가 돼야 한다는 자신의 가치 즉 주관이나 믿음이 뒤섞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종 그 예측은 틀리기 쉽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태를 놓고 보면 사실의 총합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특검 수사결과든 언론보도든, 행여 어떤 부분이 거짓일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적 환경은 비교적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의 촛불과 태극기는 끝없이 쏟아진다. 확실한 사실이라도 서로 달리 해석한다. 확실하지 않은 사실이라면 한쪽은 그것이 진짜라고 하고 한쪽은 거짓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광장은 각각 보수와 진보의 가치로 나눠진 것이 분명하다. 집회의 양과 질을 별개로 하고라도 그렇다. 서로 싸운다. 법적 의견도 갈라졌다. 박 대통령 탄핵은 물론 심지어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을 놓고, 정의롭다는 쪽과 경제를 향한 사법의 횡포라는 쪽이 맞선다. 광장의 정치는 그래서 끝없이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미국 외교관으로 1950~60년대 한국에 머물렀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그의 저서 제목을 통해 한국의 정치를 ‘소용돌이(vortex)의 정치’로 묘사했다. 출구를 찾은 강물의 소용돌이가 한쪽으로 확 쏠리듯 한국 정치가 그러하다는 것. 미성숙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겨냥한 비아냥이 담겼다.

탄핵사태를 한국 정치의 미성숙으로 뭉뚱그리고 싶지는 않다. 분명 대통령의 위법적 이탈이란 사실은 존재하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구현할 가치적 정의는 있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사실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의 선의(善意)를 인정하겠다는 야당 정치인의 발언도 있었다. 나와 다른 가치라도 선의로 보겠다는 존중이다.

반면 또한 분명한 점은 광장의 정치는 사실과 가치가 혼재돼 있고 쉽게 소용돌이화된다. 더구나 광장은 SNS란 신종무기로 소용돌이의 힘을 가속화시킨다. 멀리 그리스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화려한 광장정치의 축적은 점차 나라를 가치, 나아가 신념체계의 대결로 몰입시킨다. 사실은 없고 가치의 대결만이 남는다. 비용이 크고 나라가 피폐해진다. 촛불과 깃발을 들더라도 잘 생각해야 할 때다. 이 모든 소용돌이를 헤치고 대한민국은 전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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