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손, 손, 손

  • 조정래
  • |
  • 입력 2017-02-24   |  발행일 2017-02-24 제23면   |  수정 2017-02-24
[조정래 칼럼] 손, 손, 손

“할아버지, 커피 한 잔 사줘.” 일순 주위를 둘러봤지만 머리 허연 할아버지는 나밖에 없었다. 겸연쩍음도 감출 겸 마침 손에 쥐고 있던 함양행 차표를 사고 남은 거스름돈 1천원을 건넸다. 일주일 후 토요일 서부시외버스터미널. 30대 중반쯤의 그 젊은이는 내 앞을 지나쳐 숙녀 일행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의치 않았는지 되돌아 나오면서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지나가려는 그를 불러세우고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주자 그는 90도로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다시 일주일 후 이번엔 40대 중반쯤 되는 여성이 손짓을 했다. 합천 암자에서 갑자기 내려오느라 공양을 못했단다. 나는 대합실 안 분식집 어묵 솥에서 먹음직스럽게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김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매주 토요일 시골에 가기 위해 들르는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은 안면을 튼 지 2년을 넘기면서 아는 얼굴들로 채워졌다. 나처럼 배낭을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 느슨하게 멘 어리숙한 사람도 적지 않다. 말을 섞거나 인사를 하지 않아도 얼뜨기들은 서로 보기만 해도 친근함을 내색한다. 한두 주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닌가 은근히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장삼이사가 행선지 버스노선을 묻고, 갑남을녀가 한자리에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한 날은 거창에서 탄 아주머니 한 분이 ‘덕분에 편안하게 잘 왔다’고 인사를 하고 내린다. 얼떨떨한 와중에도 퍼뜩 나는 저런 감사 인사를 스스럼없이 해 본 적이 있는가 뻔한 머릴 굴려본다.

중국과 러시아 등 공산권 도시는 떼를 지어 몰려 다니는 걸인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보여준다. 주로 식당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그들에게 ‘절대 돈을 주지 말라’는 가이드의 충고를 허투루 듣고 지갑을 열었다. 우르르 밀려오는 그들에게 포위당했다가 겨우 탈출하는 무서운 대가를 치렀다. 왜 이들은 이미 지갑을 한 번 연 사람에게 다시 손을 내미나. 어차피 지갑은 열 줄 아는 사람이 연다는 사실에 충실한 공산주의 사고가 더 합리적인가. 대형의 시혜에 익숙하고 기부자를 봉으로 보는 공산사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분산의 지혜를 모르는 이들의 교조적 태도는 염치를 아는 손과 적선 예상자의 허기까지 헤아리는 자본주의 손의 임기응변과 지혜와는 천양지차다.

가난했던 시절, 걸인은 거리에 넘쳐났다.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준 요즘이다. 소싯적 거리에서 혹은 지하도에서 내미는 손이나 접시는 걸인을 등치는 앵벌이로 의심받기 십상이었다. 동전과 지폐를 만지작거리다 손이 오그라드는 일도 부지기수. 나이가 지긋해진 지금, 돌이켜보면 부질없는 기우였다. 받는 손, 주는 손, 주저하는 손 모두의 손을 자유롭게 하라.

걸인은 기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대권주자들은 앞다퉈 복지정책의 업그레이드를 공약하고 나서고 있지만 구제받지 못하는 이들 사회적 약자들은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 부의 불평등으로 인한 유리걸식은 물론 자발적 노숙인도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다. 유럽의 복지선진국에서 시범 실시하고 있는 기본소득제도가 시행되면 나아지려나. 복지의 강화 못지않게 복지의 문제점도 증대된다. 담당 공무원부터 뽑고 나야 복지 잘되나. 일반 공무원은 복지하면 안되는가. 복지의 왜곡은 더 큰 골칫거리다. 임대아파트 인근 구석은 은밀하게 주차된 외제차로 만원이다. 생활보호대상자들이 대형 승용차를 버젓이 굴리다 적발된다. 복지예산이 수도관(전달체계) 설치·유지 비용에 뜯기고, 노후한 관을 따라 줄줄 새기도 한다.

복지의 증대만이 능사가 아니다. 보편적 복지를 말하는 이는 많으나, 선택적 복지는 인기가 크지 않다. 단순 계산으로도 표 확장에 도움이 안되기에. 복지확대 일변도의 정책은 성장 우선 논리의 근거인 ‘낙수효과의 실패’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시대착오적 포퓰리즘이다. 현장의 복지는 보편이 아니라 선택 그리고 분배와 집중을 손짓하고 있다. 적실한 분배와 누수 제로만이 비로소 복지 강화의 물길을 아래로 아래로 흐르게 할 수 있다. 이런 이치를 말하는 대권주자들이 없다. 분배-성장-분배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의 복지가 요체다. 복지 현장체험부터 해 볼 일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