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양산 원동면 용당리 가야진사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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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24   |  발행일 2017-02-24 제36면   |  수정 2017-02-24
그리스 신화 못잖은 龍들의 사랑·비극 벌어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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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진사 천제단의 남쪽 홍살문 너머로 용이 산다는 낙동강과 용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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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진사. 사당의 정면 앞쪽에 천제단이 위치하고 뒤쪽으로 천태산이 솟아 있다. 오른쪽의 정자는 칙사영접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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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왕래하던 나루터 가야진. 맞은편에 용산이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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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자 24일간 단식으로 순국한 양산군수 이만도 불망비.

긴 잠이다. 용들은 모두 잠에 들었다. 고요하여, 깊이 집중하면 용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마다 용은 바람을 일으켜 소리를 흩어 놓는다. 아니 어쩌면 저기 어딘가에서 눈 부릅뜨고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요하여, 깊이 집중하면 부릅뜬 용의 눈동자와 마주칠지도 모르지만 그때마다 용은 윤슬을 일으켜 시선을 감춘다. 양산 용당리의 낙동강, 이 강에 용신이 살았다고 전한다. 신은 죽지 않으니, 지금도 살고 있을 것이다.

신라가 가야 정벌 위해 오가던 나루터
그 앞엔 삼국 이래 祭 올리던 가야진사
맞은편엔 용산과 3마리 용이 살던 용소
수컷 황룡과 처·첩인 청룡 전설 전해져

2010년 사당 서쪽 옛 건물지 2동 확인
이듬해 사당 앞 천제단과 홍살문 복원
가야진사 안에는 龍 셋 엉킨 조각 그림
매년 5월 낙동강 용신에 ‘용신제’ 봉행

◆강의 신에게 안녕을 기원하다, 가야진사

강변의 나루터는 가야진(伽倻津). 눌지왕 때 신라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왕래하던 나루터라 한다. 강 건너 맞은편에는 자그마한 용산이 있다. 용산 밑에는 낙동강에서 가장 깊다는 용소(龍沼)가 있는데 거기에는 황룡 한 마리와 청룡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나루터 앞에는 가야진의 용신(龍神)에게 제를 올리는 사당인 ‘가야진사(伽倻津祠)’가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강의 범람을 막고 낙동강을 통한 순조로운 뱃길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왔던 곳이다. 양산 사람들은 이 사당이 신라 초기에 창건되었으며 신라가 가야와 백제를 방비하고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린 곳으로 알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지금의 한강, 금강, 포항의 곡강천 등과 함께 신라가 국가의 주요 4대 강에 제사 지냈던 ‘사독(四瀆)’의 하나로 가야진에서 국가제례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사독의 하나로 받들어져 매년 나라에서 향축(香祝)과 칙사(勅使)를 보내 국가의식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건조연대를 정확하게 알 길은 없으나, 현재의 사당은 조선 태종 6년인 1406년에 세운 것으로 전한다. 상량에 의하면 인조 22년인 1644년에 개조하였고 숙종 34년인 1708년에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 ‘가야진사’의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조선 성종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당은 1935년 하천 정리 때 용당리 비석골 산기슭으로 옮겨졌으나 1965년 즈음에 원위치인 지금의 자리로 돌아왔다.

사당이 자리한 땅은 뒤쪽의 천태산(天台山)과 강 건너 용산(龍山)을 잇는 중간 위치로 소위 ‘땅의 기운’이 모이는 지점이라고 한다. 이 일대는 2010년에 발굴되었는데, 현재의 가야진사 서쪽에서 2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형식으로 추정되며 건물지 내부에서는 제사에 사용되던 다양한 분청사기 제기들이 출토되었다. 사당의 왼쪽 깬 돌이 깔려 있는 땅이 옛 건물지다. 지금의 사당은 옛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가야진사 앞에는 천제단이 있다. 조선시대 1788년에 편찬된 ‘춘관통고’의 기록 자료를 토대로 2011년 복원한 것이다. 제단의 너비는 690㎝, 높이는 81㎝, 사방에 계단이 각 1개씩 배치되어 있다. 천제단의 동서남북에는 홍살문이 서 있다. 그 내부가 청정하고 신령스러운 공간임을 상징한다. 홍살문 남문은 낙동강과 용산을 향해 열려 있고 홍살문 북문은 가야진사를 향해 열려 있다.

◆가야진 용의 전설

외삼문인 ‘상경문(尙敬門)’을 지나면 정면 3칸 규모의 ‘용산재(龍山齋)’가 자리하고 다시 내삼문인 ‘삼용문(三龍門)’을 지나야 ‘가야진사’ 현판이 걸린 사당에 닿는다. 정면 1칸 옆면 1칸 규모인 작은 사당 안에는 ‘가야진지신(伽倻津之神)’이라 적힌 위패와 두 마리 청룡과 한 마리 황룡이 엉켜 있는 ‘화룡도’ 조각 그림이 걸려 있다. 청룡은 암컷이고 황룡은 수컷으로 청룡 중 한 마리는 첩용이라고 한다.

가야진사에는 그리스 신들만큼이나 인간적인 용신설화가 있다. 옛날 양주 도독부의 한 전령이 공문서를 가지고 대구로 가던 길에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날 밤 꿈에 용 한 마리가 나타나 남편용이 첩만을 사랑하고 자기를 멀리하니 첩용을 죽여주면 은혜를 갚겠다고 한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전령은 다음날 첩용을 죽이기 위해 용소에 갔는데, 실수로 남편용을 죽이고 만다. 본처용은 슬피 울며 전령을 태우고 용궁으로 갔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는 재앙이 그치지 않았는데, 용과 전령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봄·가을마다 돼지를 잡아 용소에 던지며 제사를 지내니 재앙이 그쳤다 한다. 제관이 된 양산군수의 권한은 막강했으며, 봉로(奉爐)로 뽑힌 인근 지역의 수령들은 군수의 명으로 향로에 불을 많이 담으면 손이 타더라도 땅에 놓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해마다 5월이면 낙동강의 용신에게 제례를 올리는 ‘가야진용신제(伽倻津龍神祭)’가 봉행된다. 제사 때에는 술잔 3개를 올리고 메, 탕, 나물 등의 제수도 반드시 3그릇씩 마련한다. 그리고 지금도 군수나 면장이 제관이 되어 제례를 주관한다.

◆양산군수 이만도를 기리다

가야진사 외삼문 왼쪽 담벼락에는 조선 후기 양산군수를 지낸 이만도의 불망비가 서있다. 그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1876년 양산군수를 지내면서 구휼미를 풀어 많은 백성들을 구해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고향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사형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며,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24일간의 단식으로 순국하였다.

불망비는 고종 17년인 1880년에 세워졌다.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옛날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용신의 사당 앞에 자리한 불망비가 이상스러웠지만 안내문을 읽어보니 납득이 된다. 군수 이만도는 실로 공무원 역사의 신이 아닌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세종 때 황룡이 물속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마냥 전설 같은 사람도 언젠가는 문득 진짜로 생겨날지 모른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물금IC에서 내려 1022번 지방도를 타고 밀양·대구방향으로 간다. 원동면 지나 조금 가면 당곡마을 왼쪽 길가에서 가야진사 이정표를 찾을 수 있다. 경부선 기찻길 굴다리를 지나면 곧 가야진사 일대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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