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전남 나주읍성 서부길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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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17   |  발행일 2017-03-17 제38면   |  수정 2017-03-17
허물어진 읍성의 봄 고샅…옛고을 옛시간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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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벽길. 나주읍성의 둘레는 약 3.5㎞로 추측되나 현재는 서성문을 기점으로 250m 정도만 남아 있다.

곰탕과 배, 그리고 왕건이 오씨 처녀를 만난 곳, 삼봉 정도전이 가슴에 촛불하나 켠 곳, 무엇보다도 대구에서 아주아주 먼 곳. 이 정도가 나주라는 땅에 대한 이미지들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천년 동안 호남의 중심이었다는 것은 그보다 인상 깊지 않았다. 전주와 나주를 합해 전라도라 한 것 역시 가벼웠다. 중심의 힘이 광주로 이동한 때가 1896년.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100여 년의 시간은 천년의 힘보다 강했다.

조선 향리들이 모여 살던 서부면 구역
읍성 중앙 ‘나주목 객사’ 금성관서 시작
정수루∼나주향교 잇는 성 안 골목길

목사내아 금학헌엔 벼락 맞은 팽나무
나주 最古 교회 건물 예수재림교회도
넓은 보리마당길 빠져 나오자 성벽길


◆호남의 중심 나주읍성, 나주의 중심 금성관

들과 강은 낮고 넉넉하다. 납작하게 뻗어 있는 나주대교를 건너며 멀고 희미한 빛가람대교를 본다. 우주를 항해하는 범선의 돛대 같다. 다리를 건너자 왼쪽으로 ‘동점문’이 보인다. 읍성의 동문이다. 눈으로 지나치며 ‘금성관’ 이정표를 쫓는다. 성안으로의 진입이다. 곰탕 간판을 단 가겟집들이 줄을 잇는다. 도시는 올망졸망하다. 복작거리는 것도 휘둥그레한 것도 없다. 차라리 근대적이다. 몇 해 전의 대구 종로와 비슷한 직선 길 끝에 나주 객사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가 보인다.

‘금성관’은 나주읍성의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외삼문인 ‘망화루’를 지나면 너른 대지 위에 중삼문이 황망히 서있다. 그 뒤로 정청인 금성관과 동서 익헌이 위엄있게 자리한다. 모두 복원된 것들이다. 내삼문은 사라졌다. 객사는 관리들의 숙소였다. 그러나 보다 중하게는 임금을 상징했다. 이곳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두었고, 이곳에서 임금의 말씀을 전해들었다. 임진년 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이곳에서 호남창의사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다. 구한말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을 때는 이곳에서 향을 피우고 통곡했다. 단발령 의거, 항일학생운동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함성도 이곳에 있었다. 금성관은 힘의 중심이었고 정신의 집결지였다. 일제는 이곳을 군청으로 이용했다. 지금 넓게 텅 빈 공간이 일제 35년의 흔적이다.

망화루 서쪽으로 큰북 달린 ‘정수루’가 서있다. 나주목 관아의 관문이다. 북은 “원통한 일을 말하고 싶을 때 치라”고 나주 목사였던 학봉 김성일이 달았다고 한다. 지금의 북은 2004년에 새로 달았다. 저 문 뒤쪽으로 나주의 동헌이 넓게 자리했을 것이다. 지금은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던 ‘금학헌’만 남아 있다. 수년 전 벼락을 맞고도 살아남았다는 팽나무가 내아의 담벼락을 가르며 우뚝 서있다. 정수루와 금학헌 사이에는 ‘나주목문화관’이 자리한다. 983년부터 1895년까지 전남 유일의 목(牧)이었던 나주목 이야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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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내아 담장을 가르며 서 있는 팽나무. 벼락을 맞고도 살았다 하여 행운의 나무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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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 시절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던 금학헌. 일제 강점기 때부터는 군수 관사로 사용했고 현재는 숙박체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고샅길 성벽길 속속 잇는 서부길

나주읍성의 중심 금성관을 시작점으로 소풍처럼 설렁설렁 걷는 길이 있다. 성 안 동네 3㎞를 이은 징검징검 서부길이다. 조선시대 향리들이 모여 살던 서부면 구역이라 서부길이다. 지점마다 스토리 보드, 안내판, 이정표 등이 설치돼 있어 헤맬 염려는 없다.

금성관, 정수루, 금학헌을 지나면 이제 나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인 예수재림교회를 만난다. 1914년 즈음 세워졌다는 건물은 자그마하고 예쁘장하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이 교회는 교육계몽운동 등을 펼친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한다. 교회 옆길로 조금 들어가면 ‘표해록’의 저자 최부의 집터다. ‘표해록’은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최부가 136일간 중국 대륙을 표류한 일기로 중국 역사상 3대 기행문으로 꼽힌다. 그의 집터에는 지금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조용하고 널찍하고 비교적 곧은 골목길이 이어진다. 길고 길어서 ‘진고샅’이라고 불렀던 골목이다. 성 안의 골목길 중에서도 가장 넓어 보리 수확기면 이 길에 보리를 널어 말려 ‘보리마당길’이라고도 했다 한다. 담장의 길이로 추측컨대 꽤 규모 있는 집들이 많다. 향리들의 거주지였다는 내력으로 읽힌다. 이곳에 구한말 경복궁 담장을 쌓았던 기술자가 같은 방식으로 쌓은 아름다운 궁궐돌담이 있다는데, 이것인지 저것인지 찾지 못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골목길을 쑥 빠져나가자 나주읍성의 성벽길이다. 길 끝 머지않은 곳에 서성문이 보인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성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왔다 전해진다. 본래 이름은 영금문,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나주읍성의 둘레는 3.5㎞에 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벽 대부분은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손실됐거나 사라졌다. 지금은 서성문을 기점으로 250m 정도만 남아있다. 성벽의 흔적들은 한없이 여리게 보인다. 여려서 살갑다. 과거 성벽이 지녔을 강고한 위엄은 보호구역이라는 안내판이 대신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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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재림교회. 나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로 일제 강점기 동안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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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읍성의 서성벽길과 서성문. 서성문은 복원 과정에서 진통과 질책을 겪고서야 온전한 전통방식으로 복원되었다. 왼쪽에 보이는 것이 금성산 줄기다.

◆성 밖 학교, 나주향교

읍성 안에서는 관리와 관아에서 일하는 사람, 부유한 농민이 살 수 있었다. 평민에게 성곽은 신분의 벽이기도 했다. 서성문 작은 텃밭에 푸른 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성 밖 가까운 하늘에는 금성산 줄기가 강건하다. 성 밖 집들은 여전히 낮다. 그 낮은 지붕들 속에 반짝거리는 기와지붕들이 있다. 옛날 학교 나주향교다.

나주향교는 태종 7년인 1407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생들의 거처였던 동재와 서재의 규모가 엄청나다. 인물의 보고라 불릴 만큼 많은 인물이 여기서 났다 한다. 지금도 여름마다 서당이 열린다. 제례 공간인 대성전은 보물 제394호로 지정돼 있다. 임진왜란 당시 대성전의 청소 담당 구실아치였던 김애남이 목숨을 걸고 위패를 금성산에 피신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향교 앞 무성한 비석의 정원에 동네 아이들이 요정처럼 폴짝인다. 비석들 중에는 김애남의 것도 있다.

많은 것들이 복원되었다. 지금도 다양한 복원과 돌담길 조성, 마을미술 프로젝트 등이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금성관의 위엄이나 나주목이라는 명성은 재생의 엔진일 것이다. 때때로 재생이라는 과격한 단어는 체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설렁설렁 징검징검 읍성을 걷는 동안 이곳의 재생이 단순히 목록의 유물화가 아님을 느낀다. 거기에는 두손매무리하지 않고 천박하지 않은 서사적인 연속성이 있다. 오랜 역사는 최고급 엔진처럼 부드럽게 강하다.

☞ 여행정보

12번 대구~광주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방향으로 간다. 담양 지나 고서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 동광주 방향으로 가다 문흥 분기점에서 제2순환도로 나주 화순 방향, 다시 효덕교차로에서 1번 국도를 타고 나주로 들어간다. 나주대교를 건너면 바로 나주읍성이 있는 원도심이다. 금성관 이정표를 따르면 쉽다. 읍성 내에는 동부길과 서부길이 있다. 자전거를 이용하는 동부길은 총 5㎞ 코스로 2시간이 소요된다. 걸어서 돌아보는 서부길은 3㎞ 코스다. 나주목문화관 앞 관광안내소 등지에서 지도를 구할 수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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