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소설 읽기의 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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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25   |  발행일 2017-03-25 제23면   |  수정 2017-03-25
[토요단상] 소설 읽기의 한 풍경
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문학작품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이 직업인 탓에 나는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소설을 읽기도 한다. 여러 작품을 동시에 읽는 것이다. 올해 들어서만 봐도 이런 식이다. 논문을 쓰기 위해 염상섭의 ‘무화과’를 붙들고 있으면서, 강의용으로 여러 작품을 읽어 왔다. 미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소설 중 하나인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으면서, 체코의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었다. 낭만주의적인 동경과 식민지 현실의 비판이 어우러진 염상섭의 ‘만세전’과 전후 일본의 혼란상에서 귀족 가문의 몰락과 도전을 보이는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동시에 다시 훑어보았다.

일과는 무관한 취미로서의 독서에서도 여러 작품을 중첩시켜가며 읽었다. 육체의 탐닉에 따른 정신의 몰락을 아이러니하게 보여 주는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과, 경제민주화를 제재로 재계를 거칠게 비판하고 있는 조정래의 ‘허수아비 춤’을 함께 봤다. 김훈의 근작 ‘공터에서’를 아직까지 읽고 있으면서 그의 대표작 ‘칼의 노래’를 최근에 읽었고, 필립 로스의 애독자가 될 생각으로, 매카시즘의 광풍이 사람들에게 배신의 삶을 강요하던 시절의 인생 역정들을 묘파한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읽기를 막 마쳤다. 그 중간쯤에, 공산주의 중국에서의 결혼과 불륜을 다룬 하진의 ‘기다림’을 연초에 인상 깊게 읽었던 연유로 그가 한국전쟁기 포로들을 다룬 ‘전쟁 쓰레기’를 붙들고 며칠에 걸쳐 나눠 읽기도 했다.

읽다가 접어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만큼 다소 길게 쉬고(?) 있는 경우들과 일일이 거론하기 곤란한 단편소설들까지 더하면, 나의 소설 읽기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동시다발적 독서라 할 이런 사태가 직업적, 개인적 특징의 결과이긴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소설들을 읽어도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문학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왜 그러한가. 이것이 이 글의 주제다.

손에 쥔 한 편의 소설을 죽 읽어가며 깊이 있게 음미하는 것이 나무랄 데 없는 감상 방법임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여러 소설을 번갈아 가며 읽는다 해서 각 작품의 감상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는다. 스토리를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각 작품의 형식적인 특성을 좀 더 뚜렷이 느끼기 좋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이기까지 하다. 다른 예술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작품을 읽는 크나큰 즐거움은 단순한 내용 파악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이 펼쳐지는 형식을 음미하는 데서 오는데, 동시다발적 읽기야말로 이러한 즐거움을 좀 더 쉽게 전해 주는 까닭이다.

위에 있는 작품들로 예를 들어 보자. 김훈 소설의 큰 특징은 반복되는 문체에서도 금방 확인되는 말에 대한 천착으로 ‘남한산성’에서 정점을 찍은 것인데, ‘칼의 노래’에서는 내용과 밀착되어 무게를 지니는 반면 ‘공터에서’에서는 오히려 내용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 두 작품을 함께 읽을 때 잘 감지된다. 필립 로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술자를 이야기를 듣는 인물로 설정해 둠으로써 주요 인물들의 인생사를 관조하게 만드는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의 능수능란한 방식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독백에 가까운 ‘죽어가는 짐승’이나 ‘에브리맨’과의 대비를 통할 때 한층 뚜렷하게 확인된다. 하진의 순진해 보이는 사건 서술 방식과 염상섭의 노회한 심리묘사를 대비할 때 서로의 장점과 매력을 알 수 있게 되고,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가 그려 보이는 인물들의 비속함과 ‘사양’의 나오지가 설파하는 고귀한 인간관 각각 또한 서로를 대비적으로 생각할 때 더 명확해진다.

이와 같이 작품이 말하는 것(내용, what)에 더하여 말하는 방식(형식, how)에도 쉽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동시다발적 소설 읽기는 문학 감상의 방법으로 제 몫을 가진다 하겠다.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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