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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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29   |  발행일 2017-03-29 제31면   |  수정 2017-03-29
[영남시론] 승복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이 있은 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 결과에 승복했는지를 두고 국민, 여야 정치인, 심지어 법률가 사이에서도 논쟁이 되었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밝힌 대로 박 전 대통령이 죄를 지었건, 박 전 대통령 말대로 잘못이 없건 ‘승복’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다툼을 벌이는 것을 보고 역시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이 객관적이냐 아니냐라는 것의 기준이 누구에게 있는가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흔히 말하는 사람에게 달렸다고 생각하지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객관적이어야만 공정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즉,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하더라도 듣는 사람의 마음이 이미 기울어져 있으면 공정하다는 느낌은 존재하기 힘들다. 줄의 양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이 보면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오른쪽 아니면 왼쪽에 있다. 필자는 법치국가에서 사법부의 판단에 대한 승복은 판단의 결론 부분을 받아들이고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재판이라는 것은 재판관이 사실관계를 증거에 의하여 그렇게 본다는 것이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하느님과 당사자만이 아는 것이다. 진실과 다르더라도 증거가 없어 진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일도 다수 있다. 그래서 살인죄로 사형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서 확정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중 진범이 잡혀 재심을 통하여 무죄로 풀려난 경우도 있다. 우리보다 선진국이라 할 미국에서도 상당수의 사형수가 DNA 검사 결과 진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석방되는 경우가 매년 발생하고 있다. 그렇기에 재판의 결과만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법원이 인정한 사실관계까지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판결에서 인정한 사실관계는 진실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재판의 전문가인 판사들이 증거에 의하여 인정하였으니 진실이 아닐 경우보다 진실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여 당사자가 진실(법관이 인정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별개의 문제다.

만일 진실을 알고 있는 당사자가 진실과 일치하는 판결을 엉터리라고 비난한다면 이는 자신의 양심을 배반한 것으로 판결에서 지고 양심에도 져 두 번 진 것이다. 그래서 판결의 결과가 아니라 그 내용에 승복·불복하는 것은 본인의 양심에 맡겨야지, 이것을 헌법과 법치주의를 부정한다고 비난할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판결에서 나타난 사실인정을 비난하는 사람도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잘못된 사실인정에 고통을 받는다면 승복하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6년 이상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법원의 판결 결과에 승복은 하지만(법치주의 하에서 어쩔 수 없다) 그 판결에 적힌 사실관계에 대하여는 도저히 승복할 수 없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대통령직을 잃었음을 인정하고 청와대를 나왔으면 그 결정에 법적으로 승복한 것이고 나머지는 본인의 양심에 맡겨야 하는 것이지, 정치인들이 나서서 헌재가 인정한 사실관계마저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세계마저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에 대하여 달리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필자는 이들의 견해도 존중한다. 다만, 의사는 환자를 바로 앞에 놓고 온갖 기계를 사용하여 진찰을 함에도 오진이 나오는데 하물며 수사기관과 법원은 가깝게는 몇 년 전, 멀게는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일을 당사자와 증인들의 말에 의하여 인정한다면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결국 수사결과와 판결에서 밝힌 사실인정이 진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그 사실인정마저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자제하여야 한다고 본다. 법이 관여하는 것은 판결의 결론을 안 받아들일 때 국가권력으로 강제하는 데까지고, 인간의 내면세계에까지 관여하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여상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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