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대구 달성 인흥마을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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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31   |  발행일 2017-03-31 제36면   |  수정 2017-03-31
1천여 매화의 수런댐에 ‘花르륵’ 만개하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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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과 목화밭, 회화나무, 매화나무가 인흥마을 남평문씨 세거지의 역사를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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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고 깨끗한 남평문씨 세거지 안의 흙돌담길. 사죽헌 담장 위로 홍매가 고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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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거당 뒷담 곁으로 청매의 화원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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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당과 석가산. 무게감 있는 건물에 기개 있게 자란 소나무와 전나무가 조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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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거당 앞 텃밭. 아저씨는 홍매 아래서 분주한 봄을 시작한다.

붉은 손들이다. 먼 데서 오는 이 미리 맞이하려고 하늘로 하늘로 높이 손 뻗었다. 곧 그리 갈 테니, 흔들리지 마라, 꽃잎 떨어질라. 한꺼번에 파르르 만개해 버리고 바람이 불면 단번에 떠나갈 모진 너, 매화야. 옛 사람들은 매화를 ‘화귀(花魁)’ 즉 꽃의 우두머리라 했고 꽃 피어나는 음력 2월을 ‘매견월(梅見月)’이라 했다. 하여 지금은 다사로운 너의 마지막 시간, 늦지 않도록 달려간 곳은 달성의 인흥마을이다.

1872년 문익점의 18세손이 터 잡은 곳
1264년 일연 머문 ‘인홍사’서 동네 유래
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로 한 마을 이뤄
2∼3m 담장 반듯반듯한 흙돌담길 눈길
매화군락 앞 목화밭·탑…마을 역사 대변

마을 언저리 용호재 터의 재실 광거당
누마루엔 추사의 ‘수석노태지관’ 편액


◆눈부신 매화의 화원, 본리리 인흥마을

돌 쌓아 올린 조산(造山) 너머로 붉은 매화들 현란하다. 수령 20~30년 남짓 된 홍매들의 군락이다. 붉은 꽃잎 뒤로 하얀 꽃잎들, 분홍 꽃잎들 소복하다. 이미 꽃눈으로 내려 물방울처럼 증발해버린 성마른 꽃들도 있다. 이곳에는 온통 붉은 홍매(紅梅), 꽃받침이 붉고 꽃잎이 하얀 백매(白梅), 꽃받침이 푸르고 꽃잎이 하얀 청매(靑梅) 등 매화의 종류가 8가지나 된다고 한다. 맵지 않은 눈은 분간이 어렵고 다만 이들의 농염한 기품에 홀릴 뿐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벌써 꽃 속에 있다. 젊은 부부, 연인들, 친구들, 한 무리의 중년들이 모두 매화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다.

매화밭 앞에는 작은 목화밭이 있다. 목화는 마른 가지들과 뒤엉켜 흙바닥을 뒹굴고 있다. 설핏 너저분해 보이지만 그 하얀 솜털의 귀한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목화밭 옆은 인흥원(仁興園)이라는 연못이 있는 정원이다. 연못 가운데에는 두 개의 작은 섬이 있고 각각 소나무와 매화나무가 점령지의 장군처럼 멋지게 솟아 있다.

이곳은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1리 인흥마을, 남평문씨들의 세거지다. 문익점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가 1872년에 처음 터를 잡았다. 마을 앞 목화밭은 선조인 문익점 선생을 기림과 동시에 흔치 않은 볼거리가 되어준다. 마을 곳곳의 매화들은 문태갑(文胎甲) 선생이 20여 년 전부터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목표는 5천 그루 이상, 현재 매화나무는 1천 그루가 넘는다.

“홍매에도 매실이 열리나요?” 홍매 아래서 밭 가는 아저씨에게 한 사람이 묻는다. “좀 적긴 해도 열리긴 열리지요.” 홍매 주위로 벌들이 유난히 앵앵대고 퇴비 냄새가 짙다. 꽃들에게도 벌들에게도 밭 가는 아저씨에게도 참 분주한 봄날이다.

◆높은 흙돌담, 정연한 길, 남평문씨 세거지

인흥마을은 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와 두 개의 재실이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인산재 문경호는 처음 터를 잡은 이후 일족의 세거를 위해 집터를 구획했는데 반듯한 흙돌담길이 가로세로 몇 줄씩 뻗어 있는 모양새가 정연하다. 마을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길고 높은 담장으로 낮아야 2m 안팎, 높으면 3m 정도에 이른다.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내밀한 살림을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더없이 말끔한 골목길은 담장 너머의 윤기 나는 삶을 짐작하게 한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문 열린 곳은 세거지의 첫머리에 위치한 수백당(守白堂)이다. ‘결백을 지키는 집’이란 의미로 수봉 문영박 선생을 추앙하기 위해 그의 아들들이 1936년에 세웠다. 견고하고 탄탄하고 무게감 있는 건물이다. 수백당 마당에는 언덕처럼 흙을 쌓아 만든 석가산(石假山)에 전나무와 소나무 등이 기개 있게 뻗었고 화단 귀퉁이에는 밑동 굵은 매화나무가 소박하게 꽃 피웠다.

수백당 오른쪽의 협문을 통과하면 문씨 집안의 서고인 인수문고(仁壽文庫)가 자리한다. 민간으로서는 가장 많은 약 2만권의 서책과 책판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인수문고 오른쪽에는 1993년에 지은 ‘중곡서고’가 있다. 이곳에는 중곡 문태갑옹이 평생 모은 근·현대의 서적이 보존되어 있다. 인수문고 왼쪽에는 ‘거경서사’가 자리한다. 두 문고의 서책을 열람하고 담소를 나누거나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수백당의 담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면 마을 언저리에 광거당(廣居堂)이 있다. 예전에는 문이 열려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출입이 금지된 모양이다. 해설사와 동행한 단체 관람객들에 슬쩍 끼어 안으로 들어간다. 광거당이 선 자리는 인산재 문경호가 처음 이 땅에 정착할 때 지은 용호재(龍湖齋)가 있던 자리다. 1910년 용호재를 확장 개축하여 지은 재실이 광거당으로 세거지의 상징적인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광거당 안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萬卷堂)’이 설치됨으로써 전국의 수많은 문인, 학자들이 학문과 예술을 토론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누마루에는 추사가 적은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으로 이루어진 집’이라는 뜻이다. 지금 연못은 메워지고 없지만 뜰 안의 대숲과 담장 밖으로 높이 솟은 노송들이 공간에 대범한 운치를 준다.

◆인흥사가 있던 자리

이곳을 찾은 지 10년 즈음 되었다. 인흥원 연못 정원도 없었고, 목화밭도 없었고, 매화나무가 이처럼 흐드러지지도 않았을 때였다. 그때 저 매화 밭은 대추나무 밭이었고 밭에는 석탑의 부재가 일부 남아 이 땅 본연의 쓰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남평문씨들이 세거하기 훨씬 전, 이 땅에는 절이 있었다. 1264년 포항 오어사(吾魚寺)에 주석하던 일연스님이 옮겨와 11년간이나 머물렀다는 인홍사(仁弘寺)다. 스님이 중창한 뒤 나라에서 인흥(仁興)이란 절 이름을 하사했는데, 지금의 마을이름 ‘인흥’은 여기서 유래한다. 인흥사는 임진왜란 때 폐사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석탑은 조각보처럼 보수되어 매화나무들 속에 서있다. 수런대던 꽃들은 탑을 추대하며 한발 물러선 듯 고요하고 꽃 속에서 탑은 평화롭고 귀하게 보인다. 마음이 고요해야 맡을 수 있는 것이 매화향이라 했던가. 오늘 매화 향 짙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 상인 대곡 지나 달성으로 진입한다. 지하철 1호선 화원역 지나 조금 가면 남평문씨 세거지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 따라 좌회전해 계속 들어가면 된다. 마을 앞 주차장이 넓다. 대구 서부시외버스정류장에서 인흥마을까지 달성2번 시내버스가 하루 10여 차례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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