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상생(相 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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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01   |  발행일 2017-04-01 제23면   |  수정 2017-04-01
[토요단상] 상생(相 生)
홍억선 한국수필문학관장

내 할아버지는 장사꾼이었다. 궁벽한 시골 예천에 살면서 하루는 용궁장으로 다음 날은 개포, 유천으로 닷새장을 뱅뱅 도는 장돌뱅이였다. 철따라 모전을 보기도 하고 더러는 제수용품을 떼다가 팔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를 사들이고 넘기는 일로 큰 이문을 보았다.

장사꾼인 할아버지의 재산목록 1호는 주판이었다. 알맹이 하나가 호두만큼이나 큰 대형주판은 늘 할아버지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손님이 오면 엄지, 검지로 부지런히 알을 굴리고, 마지막에는 새끼손가락으로 드륵드륵 지우곤 했다. 그 능숙하고 세련된 손짓은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신뢰를 가지게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주판을 다룰 줄 몰랐다. 그냥 남들 보라고 하는 허세였다. 주판만이 아니었다. 숫자도 몰랐고 한글도 깨치지 못한 까막눈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하루에도 수없이 저울을 달고 재고 셈하면서 조금도 불편 없이 거래를 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더구나 당시는 현금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외상 거래가 대부분일 때였다. 낙동강 삼강주막의 외상장부가 관광거리로 소문이 났다지만 우리집 사랑채 기둥에는 더 많은 금이 그어져 있었다. 빗금, 꺽쇠, 동그라미 등 온갖 기호가 무슨 암호처럼 이 기둥, 저 기둥에 난무했다. 객지에서 공부하고 있던 내가 가끔 집에 들르면 할아버지는 밤늦도록 나를 붙들고 그 무수한 기억의 표시들을 더듬어 가며 채권 채무의 치부책을 정리하곤 했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어느 날 대구에 오셨다. 일흔이 가깝도록 집 근처를 벗어나 본 적이 없던 분이었다. 아니 딱 한 번, 둘째딸이 60리 길 상주로 시집을 갔을 때 신행을 따라간 적은 있었다. 그런 당신께서 작정을 하고 먼먼 대구까지 온 까닭은 우선 장손인 나를 비롯해 올망졸망한 손자들이 객지생활을 하고 있으니 한 번은 살펴보아야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사꾼으로서 서문시장이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평생 동안 고작 10리 안팎의 닷새장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맴돌던 할아버지께서 모두들 “큰 장, 큰 장” 하니 도대체 얼마나 크기에 그러는 걸까 궁금했을 것이다.

대구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어서 빨리 서문시장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당신이 취급하고 있는 한지 가게부터 들러보자고 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서문시장 안에서 한지 가게를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어찌어찌 시장 한쪽 구석에서 콧구멍만 한 가게 두어 집을 찾았을 때 할아버지는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마도 큰 시장이라고 하니 어마어마한 공장에 종이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고, 화물차가 쉴 새 없이 드나들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별거 없네. 별거 없네. 저들에 비한다면 나는 대상(大商)이야, 대상!”을 연발하시는 얼굴에는 자부심 같은 것이 가득차 올랐다.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휭하니 돌아 나오던 길에 할아버지는 걸음을 멈추었다. 할애비가 오는 걸 어린 손자들도 알고 있을 터이니 뭐라도 좀 사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시장이 온통 먹거리 판이지만 당시 시장 입구에는 풀빵이나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 몇 곳이 줄지어 있었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한 집 한 집 차례대로 거치면서 국화빵을 몇 봉지나 사서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것이 또 궁금했다. “할부지요, 한 집에서 사면 덤도 많이 줄 낀데 왜 여러 집에서 나누어 사세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잠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물건은 한 집에서 사는 기 아이다. 이 집 저 집 골고루 다 팔아주어야 한다. 장사는 말이다. 한 집만 잘되면 안 된다. 다 잘되어야 한다.”

그때의 그 말씀, 일자무식이었던 시골 장돌뱅이 할아버지께서 도시의 유학생에게 전해주던 그 말씀이 지금까지 내 삶의 지혜로 남아 있다.
홍억선 한국수필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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