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히든 피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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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06   |  발행일 2017-04-06 제30면   |  수정 2017-04-06
백인에 버스좌석 양보 않아 공민권 운동의 기폭제가 된 흑인여성 로자 파크스처럼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까
[여성칼럼] 히든 피겨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히든 피겨스’, 요즘 입소문을 타고 흥행하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다. 처음엔 적은 수의 스크린으로 개봉해 곧 조기 종영할 것 같더니만 하나둘씩 퍼지는 입소문 덕분에 역주행하면서 3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당시,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에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던 NASA 머큐리 프로젝트의 숨겨진 천재들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당차고 똑똑한 세 명의 흑인 여성은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굴레 속에서도 자신의 천부적 능력과 성실함으로 당시 인종차별적인 미국사회와 남성적인 조직인 NASA의 관행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리며 새로운 도전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캐서린 존슨은 NASA의 핵심 두뇌들조차 해결하지 못한 수학공식을 혼자 힘으로 풀고서도 남성 상사 이름 옆에 자신의 이름을 단 보고서를 올릴 수 없었다. 도로시 본은 밤새워 일하고 조직 관리를 훌륭히 해내도 주임을 달 수 없었고, 보조 계산원 신분을 넘지 못했다. 메리 잭슨은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지만 계산원은 될 수 있어도 자신이 희망하는 엔지니어의 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이것이 뛰어난 수학자,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흑인 여성’인 그녀들이 직면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캐서린 존슨은 천부적인 수학 능력을 발휘해 NASA의 달 탐사 성공에 기여한 흑인 여성으로, 도로시 본은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슈퍼바이저로, 메리 잭슨은 흑인 여성 최초의 우주공학 엔지니어로 활약했음을 보여준다. 요즘처럼 빤히 보이는 유리천장이 아닌 두껍고 견고한 콘크리트 천장을 부숴버린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묘사되지만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대단했다. 특히 미국 남부는 대부분 주에서 공공건물부터 화장실, 음식점, 병원, 도서관, 심지어 교회에 이르기까지 흑인은 백인과 다른 출입구를 사용해야 하거나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물을 마시는 음수대조차 흑백이 각각 따로 설치되어 있었고 버스도 앞자리는 백인, 뒷자리는 흑인으로 칸이 분리되어 있었다.

역사는 어쩌면 영웅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히든 피겨스(숨은 인물들)나 평범한 시민의 용기가 바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인종분리 정책을 바꾸는 불씨가 된 이는 영웅적 리더십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로자 파크스라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백화점에서 일하던 재봉사였던 그녀는 퇴근길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소신과 행동으로 훗날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대모’로 우뚝 서게 된다. 1955년 12월1일, 일을 마친 로자 파크스는 버스 안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기사의 지시를 단호히 거부하였고, 기사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버스 좌석에 앉은 채 조용히 시위를 하다 체포된 후 결국 흑백분리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이 사건은 몽고메리 전역의 흑인들이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거리와 상관없이 걷기 시작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무려 382일이라는 1년이 넘는 기간 지속된다. 부당하게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평범한 여성의 단순하지만 용기 있는 거부가 미국 시민권 운동과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불씨를 던져 훗날 미국의 1960~70년대를 흔들었던 공민권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의 힘이 나비효과처럼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영화 속에는 가히 페미니즘 어록이라 할 만큼 많은 명대사가 나오지만 도로시 본의 대사는 가슴에 꽂힌다. 비록 자신은 주임이 되지 못하고 승진에 탈락해 좌절하지만 다른 분야에서 능력을 펼치는 두 친구의 활약에는 깊은 우정을 담아 다음과 같이 응원한다. “누구의 도약이든 우리 모두의 도약이야.” 우리 사회에도 나를 포함해 지금 많은 여성이 유리벽과 유리천장을 부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히든 피겨스’를 보는 내내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졌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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