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먹방시대와 도문대작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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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10   |  발행일 2017-04-10 제31면   |  수정 2017-04-10
[월요칼럼] 먹방시대와 도문대작
원도혁 논설위원

‘도살장 문 앞에서 크게 씹어본다’는 뜻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흔히 ‘흉내만으로 자족하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조선 중기 대문장가이자 개혁가였던 허균(1569~1618)이 1611년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미식가였던 그가 전라도 바닷가로 유배된 뒤 이전에 잘나갈 때 먹었던 음식과 요리, 지역 특산물을 되새기고 복기해 쓴 책이다. 조선 팔도 토산품과 별미음식이 다 나오는 조선 최고의 음식서적으로 평가된다. 벼슬할 때 먹어본 음식을 해설과 함께 기술해 당시 식품과 음식의 면면을 알 수 있는 귀한 사료다. 도문대작의 원 출처는 위나라의 조식(曹植)이 쓴 ‘여오계중서(與吳季重書)’인데 이 책에 ‘푸줏간 앞을 지나면서 크게 씹는 시늉을 함은 고기를 비록 못 얻어도 귀하고 또 마음이 통쾌해서다(過屠門而大嚼, 雖不得肉 貴且快意)’라는 대목이 나온다.

허균은 책 제목을 왜 도문대작으로 지었는지 서문에 밝혀 놓았다. 그는 형조판서와 의정부 참판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그런데 귀양 가서 거친 음식을 먹으니 이전에 벼슬하면서 호의호식하던 때가 그리웠다. 이런 마음을 실토하면서 “종류별로 나눠 기록해놓고 때로 봐가며 한번 맛보는 것이나 못지않게 한다”고 적었다. 못 먹는 서러움을 참고, 오히려 먹어본 듯이 여유롭게 행동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미식가 허균의 음식에 대한 철학과 호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방송채널을 돌리다 보면 먹는 방송(먹방)이 여기저기 나온다. ‘요즘은 먹방이 대세’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먹방에서는 육덕(肉德)이 푸짐한 남녀 연예인과 음식전문가를 자처하는 인사들이 나와서 음식을 무자비하게 먹어치운다. 전국의 이름난 음식점을 찾아 평가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밥도둑’ 식재료와 비법을 추적하며, 정직하게 음식을 만드는 이른바 ‘착한 가게’를 발굴하기도 한다. 소개되는 음식이 하도 다채로워 “저런 음식도 있었나” 하는 감탄이 나올 때도 있다. 본보기로 삼을 만한 훌륭한 음식도 많고, 먹어보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먹방들은 종종 ‘우리가 음식을 너무 가볍게 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시대 먹거리에 대해 시청자들을 오도(誤導)하지나 않나’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물론 방송인 최불암이 진행하는 ‘한국인의 밥상’과 같은 격조 높은 프로그램도 없지 않다. 이 프로그램은 질박(質樸)한 진행도 좋지만, 철마다 각 지역 전통음식과 특색을 현장감 있게 소개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와는 달리 상당수 먹방은 시청자들에게 음식에 대한 그릇된 가치를 심어줄 소지가 있어 보인다. 먹는 시합도 그렇고 엄청난 분량을 무지막지하게 먹어치우는 모습 등 신성한 음식을 너무 오락화·희화화(戱畵化)한 측면이 없지 않다. 실제로 요즘 식당에서 보릿고개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음식 귀한 줄 모르고 마구 대하고, 남기고 버리는 사례들을 어렵잖게 본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상물정이 변했다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경북도가 지난 3년간 많은 예산을 들여 학생과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인성을 가다듬는 ‘밥상머리 교육’을 한 배경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물질적 풍요에다 너무 귀하게만 자란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음식에 배어있는 철학과 가치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굳이 ‘식시오관(食時五觀, 밥 먹을 때 살펴야 할 다섯가지)’과 같은 금언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음식을 맞이하는 인간의 기본 마음자세는 경건하게 다잡아야 한다.

살다 보면 허균처럼 부침(浮沈)하고 성쇠(盛衰)하는 일은 항다반사(恒茶飯事)일 것이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어린시절 필자는 어머니에게서 ‘음식 귀한 줄 알아라’는 훈계를 자주 들었다. 그릇에 밥알 한톨 안 남겼고, 반찬도 버리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육해공 진미가 산더미처럼 차려진 뷔페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금치와 돼지고기가 들어간 잡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어린시절이 교차돼서다. 좋은 음식, 귀한 음식을 접할 때는 한번쯤 이 ‘도문대작’의 참뜻을 되새겨볼 일이다.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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