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애는 소가 키우나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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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13   |  발행일 2017-04-13 제31면   |  수정 2017-04-13
[영남타워] 애는 소가 키우나

후배가 최근 육아휴직을 했다. 주말 부부로 세 명의 아이를 키우는 직장 여성인 그가 휴직에 앞서 그린 그림은 제법 근사했다.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문화센터에서 강좌도 듣고, 우아하게 브런치도 즐기고, 바빠서 그만뒀던 헬스장도 다니고.

그의 부푼 꿈이 깨지는 데는 딱 하루면 족했다. “백수 과로사 한다더니 그 짝”이라는 하소연이 돌아왔다. 올망졸망한 아이 셋을 유치원으로, 학교로 보내고 돌아서면 오전시간이 휘리릭 지난다. 식탁에 선 채로 허겁지겁 밥을 먹고 대충 집을 치우고 세수 정도를 겨우 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간식을 챙기고 숙제를 체크하고 학원으로 보내놓고 나면 벌써 저녁 시간. 그 틈틈이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해야 한다. 별 것 아닌 일들을 ‘그까이 거 대충’하는데도 하루는 쏜살같다.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 시간은 허망하다. 바다 위를 지나는 배처럼,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흔적없이 흐르는 시간이다. 아이 셋을 키우는 데는 한 명의 아이를 돌보는 것의 3배가 아닌, 3의 세제곱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법. 가끔씩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이 생각없이 “잘 쉬고 있냐”라는 인사를 건넬 때면 울컥해진다. 아이들도 집에 없고 집안일도 할 것 없는, 우주가 합일되는 기적 같은 ‘쉬는 시간’을 그는 단 한 번도 맞지 못했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회사에 복직한다고 그의 삶이 달라질 법하진 않다. 하루에 몇 번, 볼 일 보고 양치하러 들르는 여자화장실에서 목도하는 전쟁은 그의 예정된 미래다.

“숙제 다했어? 이제 곧 학원 차 올 테니 지금 나가야 해” “감기는 좀 어때? 열은 안 나? 냉장고에 간식 좀 챙겨 먹어” “엄마 오늘 좀 늦어. 미안해. 내일은 약속 꼭 지킬게. 아빠랑 먼저 씻고 자”. 전화기 너머 아이의 축처진 어깨가 생생하게 그려지면서 내 마음도 짠해진다. 그럴 때면 남자 화장실에도 한번 들어가보고 싶어진다. 그들은 화장실 안에서 어떤 전화를 받을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명분 아래 살림과 육아를 통째로 몽땅 떠넘기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회사를 그만두었거나, 둘째를 낳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시어머니랑 함께 사는 거 불편하지 않아?” “시어머니 모시고 사네. 진짜 효부네”라는 질문 내지 감탄에 미소로 화답하곤 했지만, 그 당시 나는 영혼이라도 팔아야 했다.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우리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떨어지는 혼인율과 출산율엔 다 이유가 있는 법. 정부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동안 저출산 대책에 약 80조원을 썼지만 지난해 출생아 수는 40만6천300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육아와 가사를 여성에게 전담시켜 그 등골을 빼먹으며 굴러가는 한국 사회의 작동 방식을 변화시켜보겠다며 대선 주자들이 내놓은 공약들은 일단 반갑다. 출산휴가에 이어 곧바로 육아휴직을 할 수 있도록 자동 연계하는 ‘자동 육아휴직제도’, 부부가 한 자녀에 대해 쓸 수 있는 육아휴직 총 기간을 정하고 그 중 일부를 아빠 몫으로 의무 할당하는 ‘아빠 할당제’, 육아휴직 급여를 올리고 기간을 늘리는 한편 육아휴직을 경력으로 인정하자는 ‘슈퍼우먼 방지법’, 18세 이하 자녀를 둔 부모로 육아휴직 대상을 확대하고 최장 3년까지 쓸 수 있도록 하는 ‘육아휴직 3년법’ 등. 이 그럴싸한 공약들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구체화되고 실천될까, 더불어 법과 제도보다 더 중요한 사회·문화적 인식의 변화는 또 어떻게 이뤄낼까, 지켜볼 일이다.

“내가 미쳤지. 왜 애를 셋이나 낳았을까요?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결혼도 출산도 모두 ‘노 땡큐’예요.” 하소연하는 후배에게 위로랍시고 “그래도 지금 우리가 고생한 덕분에 딸들이 결혼할 때쯤이면 세상도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후배는 “남북통일이 되면 우리나라는 얼마나 살기 좋아질까를 상상해보는 느낌”이라고 답했다. 좋은 세상은 아직, 너무 멀리 있다.

이은경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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