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가장 겸손한 선택

  •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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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18   |  발행일 2017-04-18 제30면   |  수정 2017-04-18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는데
한반도 전쟁 가능성 낮다는
전문가 견해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상황 대비하는 것이
가장 겸손한 선택
[화요진단] 가장 겸손한 선택
이재윤 경북본사 총괄국장

미국은 좀처럼 물러날 태세가 아니다. ‘전략적 인내’라는 모호한 기존 대북(對北)정책은 휴지통에 버린 게 확실하다. 어제(17일)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전략적 인내의 시대는 끝났다”며 이를 확인했다. 북한은 벼랑 끝에 서서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다.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태양절’(15일)에 해외 언론까지 불러들여 신무기들을 자랑했다. 하루 뒤 방한하는 미 부통령이 보란 듯 탄도미사일도 발사했다. 미국을 향한 노골적이고 사생결단식 도발이다. 중국의 한반도 영향력은 휠씬 커지고 있다. 독립적으로 수행하던 기존의 ‘중국 역할론’을 넘어 미·중 협의사항을 한반도에서 실현하는 ‘대행자(代行者)’로 그 위상이 격상된 듯하다. 일본은 한반도 위기론을 조장해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다. ‘전쟁 가능한 국가’로의 명분 축적과 집권세력 결집의 호기로 삼고 있다.

한반도 운명의 시곗바늘은 빠르게 돌아가는데 당사자 한국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다. 당국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심지어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한국을 배제한 한반도 문제 논의)’이란 대단히 자존심 상하고 위험천만한 표현까지 나온다. 그런 한국을 향해 해외 언론은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모든 신호가 전쟁을 가리키는데 왜 한국인은 동요하지 않을까?” 해외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한다. 우선 북의 도발에 만성이 됐다는 것이다. 의미있는 분석은 아니지만 딱히 아니라고 하기도 힘들다. 또 다른 이유가 거슬린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휴전협정 위반이란 것이다. 시리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북의 핵능력, 중국의 북한 지원 가능성, 한국·일본의 반대 등도 미국이 북한을 쉽사리 공격 못하는 이유로 꼽는다. 실제 많은 미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이 한국에 거주하기 때문에 미국과 북한 모두 군사적 행동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전문가들의 (전쟁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은 우리가 선택하고 정책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기준으로 삼기엔 적절치 않다. 전쟁이란 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 피해와 고통의 당사자이지 외국 전문가처럼 냉정한 제3자가 아니다. 실제 전쟁이나 역사적 대(大)사건 중에는 객관적 분석의 틀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다. 진주만 공습이 그렇고, 구 소련의 붕괴나 9·11 테러 역시 전문가들의 관찰과 분석 밖에서 일어났다.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관찰하는 수많은 상징과 징조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건들로 역사적 진로가 바뀐 사례는 부지기수다. ‘뛰어난 전문가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사건 가운데 15%가 현실에서 일어났고,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사건의 25%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전을 던져 판단할 때보다 낫지 못했다’(미 펜실베이니아대 필립 테틀록 교수)고 한다. 20년에 걸쳐 전문가들의 예측 능력을 분석한 테틀록 교수는 더 정확한 예측을 위해 ‘겸손한 자세’를 강조했다.

교토삼굴(狡兎三窟).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놓는다. 미래의 어려움을 대비하는 토끼의 지혜다. 위기의 한반도 앞에도 세 개의 동굴이 있다. (1)미국은 선제공격을 못(안) 한다 (2)설득과 압박으로 해결 가능하다. (3)전쟁 가능성이 높다. 모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미로(迷路)가 이어져 있다. 그렇지만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선순위는 (3)이라고 본다. 전쟁을 부추기고 준비하자는 게 아니다. 전쟁에 철저히 대비해 전쟁의 가능성을 줄이자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며 통탄하기보다는 비 오기 전에 부서진 창(窓)을 고치는 자세다. (3)의 길은 틀려도 손해 보지 않는 선택이기도 하다. 희망 섞인 기대감이나 설익은 명분은 곧잘 잘못된 선택을 낳는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겸손한 선택’이다. 그만큼 한반도 상황은 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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