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대본 없는 스탠딩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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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18   |  발행일 2017-04-18 제30면   |  수정 2017-04-24
대본이나 준비된 자료 없이
진행되는 스탠딩 토론은
답변태도와 내용을 보고
후보를 검증하는 데 제격
이번 대선서 꼭 이뤄져야
20170418
이수희 변호사

요즘 광화문과 청계천 근처는 차를 타고 이동하기에는 날씨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밉게 타서 며느리 내보낸다는 봄볕이지만, 사무실에만 있다 거리로 나서면 볕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게다가 광화문 근처에는 대형 서점과 유명 중고서점이 있어 거리를 걷다가 좋은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까지 더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대형 탁자를 설치해놓은 서점도 있고, 나무 소재의 계단을 만들어 아이들이 엎드려서 책을 볼 수 있는 곳도 있다. 도서관은 조용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 전화가 자주 오는 나 같은 이에게 서점은 이런 저런 책을 속독하고 싶을 때 최적의 장소가 된다.

서점을 찾게 될 때는 요즘 내가 쓰는 단어가 너무 제한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다. 어휘력은 곧 그 사람의 지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까탈스러운 믿음 때문이다. 이런 저런 책을 속독하다보면 문어체 특유의 고급스러운 단어들을 상기하게 되고, 4차 산업혁명 같은 핫 이슈도 뒤처지지 않고 챙길 수 있게 된다.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 같은데,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은근히 위축이 된다. 학창시절 독서를 많이 한 학생을 높게 평가하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 살다보니 꾸준한 독서가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요즘 독서 장려운동을 펼쳐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장 딸아이부터 스마트폰만 들고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쓰는 말은 또래들의 은어나 인터넷상 축약한 말들이 많고, 감정을 표현하는 말도 예전보다 빈약한 것 같다.

일상에서 어르신들이 말씀하는 걸 들으면 TV진행자보다 더 어휘와 표현이 풍부하다. 다양한 속담을 활용하고 형용사도 맛깔스럽게 사용한다. 친구끼리 앉아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다 “대~박” 감탄사만 주고받는 요즘 환경에서는 표현과 어휘가 대화 속에서 늘 수가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독서이고, 그만큼 말하기는 그 사람의 내면에 많은 점을 추측해볼 수 있는 지표가 될 수 있다.

다양한 어휘를 구사한다는 건 곧 말하는 사람의 관심사가 그만큼 넓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가 정확하게 배치된 문장을 구사한다는 건 곧 말하는 사람이 평소 생각과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는 근거일 수 있다. 최순실 게이트에서 나온 통화 녹취록에서 ‘이거하고’ ‘저거하고’란 문장이 많아서 말들이 많았는데, 주어·목적어·서술어를 정확하게 구사하여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만 그런 사람이 국정에 관여했다니 말버릇까지 공분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전 대본이나 준비된 자료 없이 진행되는 스탠딩 토론이 대통령 후보 검증을 위해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후보 캠프에서 스탠딩 토론을 거부했다고 ‘노쇠한 후보’ 운운하는 공격을 보면서 무슨 토론으로 체력 테스트를 하자는 건가 싶어 실소가 나왔다. 신체적 스탠딩 토론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 후보 토론처럼 사전 대본도 없고 자료도 볼 수 없게 진행되는 토론을 해야 한다. 그래야 시청자는 후보의 답변 태도와 내용을 보면서 후보가 국정 전반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체화된 답을 하는지 아니면 급하게 외운 답을 내뱉는 건지 알 수 있다. 상대 후보가 던지는 돌발 질문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고 후보가 정책 공약이나 국정 기조에 관해 평소 고민을 해왔는지 아니면 캠프에서 만들어준 걸 앵무새로 답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남의 나라 대통령 연설에 감명받고, 남의 나라 대통령 후보토론회를 보면서 부러워하던 마음을 이제는 우리 후보들을 보면서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어수선한 한반도 정세를 그나마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후보를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유권자에게 제공하는 것도 후보들의 의무란 생각이 든다.
이수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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