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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마저 멜로디 팔색조 재즈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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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호기자
  • 201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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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 인 대구(JAZZ IN DAEGU)

재즈 발상지 美 뉴올리언스…이후 여러 형태 변모

韓 재즈 시작은 1926년 홍난파의 ‘코리안재즈밴드’

1985년 ‘다운비트재즈연주단’…대구의 재즈 태동

1926년 3월1일. ‘울 밑에 선 봉선화야~’로 시작되는 가곡 ‘봉선화’의 작곡가 홍난파. 그가 ‘코리안재즈밴드’를 결성한다. 한국에서 처음 ‘재즈(JAZZ)’가 발아되는 날이다. 그 시점은 ‘재즈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던 루이 암스트롱이 고향 미국 뉴올리언스를 떠나 시카고에 정착하던 때. 그가 1929년 뉴욕으로 진출할 때 미국은 대공황기, 하지만 재즈는 되레 최전성기를 맞는다. 다들 ‘일제강점기에 웬 재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일제 때 지구촌 재즈는 절정기를 맞는다. 재즈는 코카콜라·스타벅스 커피 못지 않은 파급력을 가졌다. 미국의 재즈는 유럽의 자양분 덕분에 태어나지만 그것은 흑인노예의 노동요 ‘블루스(BLUES)’에서 출발, 전 세계 음악의 근간을 뒤흔들어버렸다.

국내도 이판근, 강태환, 강대관, 신관웅, 이동기, 최선배, 김준, 박성연, 류복성, 김수열 등 재즈 1세대에 이어 9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유학파 재즈뮤지션의 스펙트럼이 최근에는 꽤 두껍고 다양해졌다. 경기도 가평군에서 열리는 올해 14회를 맞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과 함께 10년 역사의 대구재즈페스티벌, 칠포재즈페스티벌은 비슷한 역사의 서울재즈페스티벌과 함께 한국재즈 국제화에 일조하고 있다.

1985년 서울에서도 선뜻 시도하지 못했던 재즈 전문 연주단이 대구에서 태동했다. ‘다운비트재즈연주단’인데 아직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도 대구를 제2의 뉴올리언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숨은 재즈맨이 연이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재즈가 대구에 어떻게 정착할 수 있었는지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재즈 인 대구(JAZZ IN DAEGU)’, 그 뒤안길을 따라가 봤다.

◆재즈 고향 …뉴올리언스

재즈의 고향은 뉴올리언스. 여긴 원래 프랑스령이었다. 스페인의 노예무역선 아미스타드호를 타고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흑인과 프랑스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크레올(Creole)’. 마치 선창 홍등가 같았던 ‘스토리빌’. 거기 살던 절망의 크레올 앞에 꿈의 악기가 등장한다. 군악대용 관악기였다. 미국과 스페인의 싸움 와중에 병참기지가 된 뉴올리언스. 거기로 밀려든 군수품에 그 악기도 섞여 있었다. 현악기 세상이었던 유럽, 거기서 푸대접 받던 관악기가 대서양을 건너와 크레올을 만나 재즈를 잉태한 것이다. 그런 재즈가 훗날 ‘다국적 음악’이 될 줄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두툼한 흑인의 입술과 관악기는 ‘환상의 쿵짝’이었다. 크레올은 항구 근처에서 연주를 하며 호객행위를 했다. 그 무렵 재즈 연주 스타일은 ‘랙타임(Ragtime)’. 이 장르가 뭔지 알려준 게 바로 영화 ‘스팅’ 주제곡, 스콧 조플린 작곡 ‘더 엔터테이너(The entertainer)이다.

뉴욕으로 몰린 대다수 흑인 재즈연주자. 흑인 스스로는 백인사회로 절대 파고들 수 없었다. 누군가의 조력이 절실했다. 이때 좌파 지식인이었고 밥 딜런과 빌리 할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등을 발굴한 프로듀서 존 하몬드가 수호천사로 등장한다. 그는 흑인 재즈뮤지션의 대변자였다. 하지만 재즈산업의 최대수혜자는 백인이었다. 백인이 개발한 악기를 든 20명에 가까운 빅밴드, 그들은 플로어에 모인 백인 춤꾼의 흥겨움을 위해 존재했다. 그때가 바로 ‘스윙재즈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찰리 파커·디지 길레스피·존 콜트레인·듀크 엘링턴 등은 재즈에 대해 정색한다. ‘더 이상 재즈가 백인들의 기쁨조가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재즈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 정신이 바로 프리·모던재즈시대를 개막시킨 ‘비밥(Bebop)’이다. 하지만 스윙재즈와 달리 비밥은 춤추기 어려웠다. 무대 연주만 특화되고 춤판은 사그라들었다. 너무 예술적이었던 비밥, 돈은 꽝이었다. 프리재즈는 상업성에서 벗어났지만 그게 결국 그들의 목을 죄는 ‘족쇄’가 된다.

재즈가 탄생할 즈음 미국 백인은 유럽에서 건너온 바이올린, 밴조, 만돌린 등을 앞세운 ‘컨트리 뮤직’에 침잠해 있었다. 이 둘이 만나면서 리듬앤블루스와 로큰롤 시대가 시작된다. 이 흐름에 한국도 예외일 순 없었다.

◆재즈는 로큰롤을 낳고

프리재즈의 자양분을 건네받은 백인 연주자. 그들은 한과 절규가 스며든 흑인만의 ‘블루스(BLUES)’에 주목한다. 블루스는 재즈의 원천이었다. 기존 컨트리와 비교할 수 없는 음악적 보디감이 녹아 있었다. 치명적인 노동판, 일상에서 대화가 금지된 흑인 노예들, 그들은 하늘을 보며 홀로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허밍에 가까운 흥얼거림의 율조가 바로 블루스. 백인들은 너무 실험적이어서 돈이 안 된 비밥을 딛고 ‘리듬앤블루스’를 만들어낸다. 이 음습한 할렘가 음악은 50년대 풍요 속 한없는 절망을 느꼈던 미국 10대의 분노와 만나 ‘빅뱅’을 일으킨다. 그게 바로 ‘로큰롤 신드롬’이다. 로큰롤(Rock and Roll)은 ‘성교’란 흑인들의 비속어였다. 리듬앤블루스의 별칭이 바로 로큰롤이었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흑인의 슬픔이 백인 10대의 슬픔과 의기투합한 것이다. 55년 상영된 영화 ‘폭력교실’에 삽입된 빌 헤일리의 노래 ‘Rock around the clock’이 10대의 ‘애국가’로 등극하면서 로큰롤 시대가 개막된다.

로큰롤은 전설적 DJ 앨런 프리드가 만든 용어다. 그는 백인들로부터 ‘사탄의 음악’으로 찍혔던 리듬앤블루스를 로큰롤로 에둘러 표현했다. 연이어 리틀 리차드의 ‘롱 톨 샐리(Long tall sally)’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트 브레이크 호텔(Heart break hotel)’이 만나면서 골격이 갖춰진 로큰롤, 궁극에는 비틀스의 롤모델이었던 척 베리를 만나면서 로큰롤 교본이 완성된다. 그 교본을 카피했던 비틀스는 63년 미국을 침공해 4인조 록뮤직의 신지평을 연다. 밥 딜런은 미국 포크뮤직의 정수 중 하나인 컨트리에 기인한 포크를 록이 가미된 모던포크로 발전시켜놓는다.

현대 팝의 역사는 재즈의 재해석판이다. 서양음악은 재즈란 용광로로 들어왔다가 각기 다른 색깔로 파생돼 나갔다. 마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현대민주주의에 미친 영향만큼이나 재즈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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