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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시대·장르 넘나드는 재즈의 무한 변주…삶을 응원하는 흥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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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호기자
  • 201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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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 인 대구(JAZZ IN DAEGU)

우리나라 재즈의 역사

미8군 출신 연주자 9명이 대구 첫 재즈 연주단 ‘다운비트’를 창단하고 스탠드바 ‘남태평양’에서 공연을 가졌다. 앞줄 왼쪽부터 임영수·조현태·김일수·유차목·조봉권. <다운비트 재즈연주단 제공>
다운비트 창립연주 팸플릿
30년대 日 거쳐 유입된 서양 대중음악
샹송·탱고에 팝송까지 ‘자스’라 불러
이난영은 39년 재즈풍 ‘다방의…’ 취입
일제강점기 악극단에 의해 널리 소개

광복∼美 군정기 실력파 연주자들 등장
‘신라의 달밤’ 현인은 재즈 싱어로 주목
韓 전통가요 작곡에도 재즈가 큰 영향
55년 이전 美8군 쇼는 한국 재즈의 뿌리

85년 대구 ‘다운비트 재즈연주단’ 창단
10월 조현태 등 9인조 스탠드바 첫 공연
“생업보다도 연습…매번 새로운 곡 선사”
대구 재즈 1세대로 든든한 버팀목 역할

◆이난영…그리고 재즈

에디슨이 개발한 축음기에 녹음된 숱한 재즈 음원은 일본을 딛고 한국으로 대거 유입된다. 홍난파가 그 흐름을 재빨리 간파해 한국 재즈의 첫 단추를 채워준다. 재즈의 한국적 변용은 트로트 범람 속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져나간다.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건이 출간한 ‘한국 재즈 100년사’에 따르면 1936년 가수 삼우열은 처음으로 ‘다이나’라는 미국 재즈곡을 녹음했고 3년 뒤 이난영은 재즈풍의 가요 ‘다방의 푸른 꿈’을 취입한다. 손목인은 그해 우리말 음반에서 최초로 재즈 뮤지션이 간주 때 ‘비비밥밥~’같이 의미없는 흥얼거리는 창법 중 하나인 ‘스캣’을 사용해 ‘씽씽씽’을 작곡한다. 특히 59년 손석우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에서 ‘블루노트’(장음계에서 제3음과 7음을 반음 낮춰 연주하는 재즈의 독특한 음계)를 사용한 재즈풍의 편곡을 도입한다.

30년대 일본을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서양 대중음악은 당시 일본식 용어로 모두 ‘자스’로 불린다. 자스란 미국을 포함한 서양음악의 통칭이었다. 샹송, 탱고, 룸바 등까지 포함한 재즈는 한때 경음악·팝송·세미클래식 등과도 혼용된다. 일부에선 ‘마이 웨이(My way)’ 같은 곡을 원곡대로 안 부르고 음을 좀 폼나게 밀고 당기고만 잘해도 재즈 가수로 분류하기도 했다.

◆재즈…악극단

일제 때 유랑 가극단. 광복 직후 색소폰·트롬본·트럼펫·드럼·콘트라베이스 등 더욱 다양한 관·현·타악기가 가세하자 가극단은 악극단·경음악단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이런 문화적 인프라를 딛고 광복~미군정기, 쟁쟁한 실력파 재즈 연주자가 등장할 수 있었다. 이난영의 남편이었던 김해송의 ‘KPK악단’. 59년 미국 진출 첫 한류 자매트리오로 불리는 김시스터즈의 아버지가 바로 김해송이다. 손목인의 ‘CMC악단’, 반야월의 ‘남대문악극단’, 황문평의 ‘장미악극단’이 미8군 클럽과 댄스홀(카바레)을 주름잡는다. 한국 전통가요 작곡가는 거의 재즈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당시 경음악단이 선호했던 곡은 미국 본토의 재즈곡이 아니었다. 탱고와 룸바, 지터버그 등 관능적이고 육감을 자극하는 댄스곡 위주였다. 50년대를 풍미했던 페페즈 프라도가 작곡한 ‘체리핑크맘보’는 이들 악단의 주 레퍼토리였다. ‘신라의 달밤’을 부른 현인은 박단마와 함께 미군정 때 재즈 싱어로 주목받는다. 특히 서울대 치대 출신인 베니김(김영순)과 길옥윤, 서울대 음대 출신의 송민영은 경기중 3학년생이던 박춘석과 함께 국내 첫 스윙밴드격인 ‘핫 팟’을 결성한다.

1955년 7월26일 미8군사령부가 일본에서 서울 용산으로 이전된다. 미국 본토에서 건너온 USO 공연단이 국내에서 위문공연을 펼쳤다. 하지만 국내 미군들의 밤문화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50년대말 전국 미군클럽 수는 260여개. 국내파 악극단과 미8군 클럽문화가 부딪히면서 형성된 게 바로 ‘미8군쇼’. 미8군쇼는 한국 재즈의 뿌리였다. 미군클럽과 국내파 연주자를 연결해주는 공연대행사가 절실했다. 57년 드디어 미8군쇼 무대만 상대로 하는 용역업체가 탄생한다. ‘상공부 등록 용역불 수입업자’란 자격을 취득해야 했다. 그 첫 용역업체가 바로 ‘화양흥업’이었다. 화양은 이후 유니버설과 함께 베트남전 파병이 본격화된 66년 여름까지 국내 미8군쇼를 독점하게 된다.

한국의 재즈는 본격적이지 않고 어정쩡했다. 클래식도 팝송도 가요도 아닌 무엇 사이에 낀 ‘샌드위치 뮤직’과 같았다. 훗날 90년대 유학파 재즈 2세대가 등장해야 재즈다운 재즈를 감상할 수 있게 된다.

◆대구 다운비트 재즈연주단 태동

85년 10월12일 오후 2시30분.

대구에 기념비적인 재즈연주단이 탄생한다. 바로 9인조 ‘다운비트 재즈연주단’(이하 다운비트)이었다. 서울의 재즈 1세대조차 제대로 된 재즈팀을 꾸려나가기가 힘든 때였다. 단체 이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작고한 조현태가 ‘다운비트’를 제안해 성사됐다. 당시에는 재즈를 다들 ‘째즈’라고 불렀다.

창단 멤버는 보컬 및 편곡을 담당한 조현태(작고)와 조봉권, 색소폰은 김상직과 김일수, 트럼펫은 유차목, 드럼은 김기풍, 기타는 임영수, 피아노는 박문희, 베이스는 김돈수가 맡았다. 이들 모두 원곡을 다양하게 재즈적으로 편곡할 수 있고 간주 타임 때 16·24·32·48소절 독주 애드리브도 쳐낼 수 있는 미8군 출신의 실력파였다. 초대 단장은 김상직이 맡았고 이후 김일수가 지금까지 단장을 맡고 있다.

다운비트는 시내 동인호텔 서쪽 해동라사 옆에 있었던 ‘남태평양 스탠드바’에서 창단공연을 했다. 그날 이 공연을 진심으로 축하해준 사람이 있다. 일본에서 정통파 재즈맨으로 활약했던 작곡가 길옥윤이었다. 그는 사정이 생겨 못 오고 대신 축전과 화환을 보낸다.

재즈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스탠드바에서 창단공연을 하게 된 건 당시 거기 사장이 유차목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여든의 고령이지만 여전히 현역 트럼피터로 ‘한울림 윈드오케스트라’와 30인조 ‘마칭밴드’에서도 큰 역할을 해주고 있다.

다운비트는 연주 때마다 15곡 정도를 소화해야만 했다. 엘프 같은 자동반주기가 없었던 시절이라 연주자는 레퍼토리를 통째로 근육 속에 집어넣어야만 했다. 오직 연습뿐이었다. 연습과 관련해 유차목이 자기 사부인 강대관과 루이 암스트롱 사이에 벌어진 해프닝을 알려줬다.

63년 4월8일 방한한 루이 암스트롱이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공연할 때였다. 그가 한국에서 가장 트럼펫을 잘 연주하는 재즈맨을 불러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사람이 바로 한국 트럼펫 리더격인 강대관. 강이 몇 마디 불자, 그는 실망한 표정으로 도대체 ‘하루 몇 시간 연습하느냐’고 질문했다. 2시간이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는 “당신 소리는 트럼펫 소리가 아니다”라면서 강대관을 돌려보낸다. 루이 암스트롱도 본공연보다 연습을 더 중시했다. 감각을 안 잊기 위해서다. 강대관은 그날부터 죽을 듯 연습에 매진했다.

다운비트는 흉내내는 재즈판이란 지적을 듣지 않기 위해 2년여 불철주야 연습에만 매달렸다. 생업에 지장이 있었지만 다들 개의치 않았다. 연주 때마다 새로운 곡을 선보이는 걸 원칙으로 했다. 그러니 한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다음 연주회 준비에 몰두해야만 했다. 하지만 비밥 같은 정통 재즈 연주는 무리였다. 할 수 있어도 들을 수 있는 객석을 찾기 어려웠다. 현실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Take 5’ ‘More than blues’ ‘All of me’ ‘Take the ‘A’train’ ‘Misty’ ‘In the mood’ 등 팝송 같은 달달한 재즈, ‘마이 웨이’ 같은 팝송을 재즈적으로 편곡해 무대에 올렸다. 그 밖에 벤처스악단, 글랜밀러악단, 로저와그너악단의 주옥같은 곡도 선호됐다. 소화해낸 악보가 수북하게 쌓여갔다.

다운비트는 노선 차이로 92년 김상직·김일수를 축으로 재편된다. 김일수는 96년 지역 색소포니스트로는 처음으로 대학 강단에 선다. 주변 연주자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육군 20사단 군악대 출신으로 평생 색소폰만 불며 살아왔다. 현재 대구색소폰앙상블을 맡고 있다. 그도 ‘본토 재즈’를 맘껏 펼치고 싶었지만 시대적 상황이 뒷받쳐주지 못했다. 객석의 수준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 자연 세미재즈풍의 연주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국악, 가요, 영화와의 크로스오버 재즈 무대도 끌어냈다. 그는 “재즈 1세대는 다들 생계 때문에 고단했지만 지금 유학파 후배들은 더 재즈적으로 살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것 같다”면서 다운비트와 유학파 재즈맨의 교류를 기대했다.

2000년 김상직·김일수는 수성못 옆에서 재즈라이브클럽 ‘OB캠프’를 오픈한다. 다운비트의 뒤를 이어 ‘밀라노’ ‘예그린’(옛 달구벌), ‘파인연주단’ 등과 같은 예전 1세대 연주자들을 축으로 한 추억의 경음악단도 재즈문화 다양화에 일조하고 있다. ☞ W3면에 계속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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