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절망의 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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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26   |  발행일 2017-04-26 제30면   |  수정 2017-04-26
판사들의 사법개혁 움직임, 판사들의 사법개혁 움직임…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
우리 모두 눈 부릅뜨고 사태 마무리까지 지켜봐야
20170426

헌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심판, 전 대통령 구속 수감, 조기 대선 등 워낙 굵직굵직한 뉴스가 많아 묻힌 감이 없지 않은, 하지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법부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관련 뉴스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건 지난달 말 판사들의 여론조사 결과가 포털 사이트 주요 뉴스로 등장했을 때다. 법원 내 판사들의 학술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전국의 판사 5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법독립과 법관인사제도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대법원장이나 소속 법원장의 정책에 반하는 의사 표현을 해도 보직과 인사평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없다”는 명제에 대해 88.3%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상급심 판례에 반하는 판결을 한 법관이 보직이나 평정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없다”는 명제에 대해 45.3%가 공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2년 임기제 공무원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래도 법원 내부에서 내가 경험한 판사들은 행정부 공무원과는 달리 조직에 연연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본 판사 대부분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규정한 헌법 제103조를 자부심을 갖고 누리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기사에 나온 그 높은 수치가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설문 조사 결과를 의심하기엔 표본수가 너무 많았다. 501명이면 2천900여명의 전국 판사 중에 15% 이상이 응답한 것이니 말이다.

법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가 내 주요 관심사는 아니었으므로 뉴스도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19일 보도된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읽고서야 이미 다 보도된 일련의 사태를 뒤늦게 알았다.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학술대회를 법원행정처가 그렇게 막으려고 했고,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사법개혁 움직임을 손보려고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이는 등 문제가 커지자 차기 대법관 ‘0순위’나 다름없는 법원행정처 차장이 자진 사퇴한 일이며,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된 사실까지. 진상조사위원회는 한 달 남짓한 조사 끝에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가 학술대회 연기와 축소 압박을 가한 점은 적정한 수단과 방법의 정도를 넘어서는 부당한 행정에 해당하고, 그 고위 간부가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 회의에 보고하고 그 대책이 일부 실행된 이상 법원행정처도 그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사태의 전말을 조금 알고 나니 몇 년 전 읽었던 ‘절망의 재판소’가 떠올랐다. 일본에서 33년간 법관 생활을 하면서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우리로 치면 법원행정처)에서 두 번이나 근무한 적이 있는 엘리트 법관 출신의 학자이자 변호사인 저자가 일본 사법부와 판사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충격적인 내용의 책이다. 저자는 평범한 일반 시민이라면 ‘재판소·재판관’(우리로 치면 법원·판사)이라는 말을 들으면 약간은 차갑지만 공정하고, 융통성은 없지만 성실하고 논리적이며 출세 따위에는 연연해하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런 재판관이 하는 재판에 대해서도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포문을 연다. 일본의 재판소가 권력과 사회적 강자로부터 국민의 인권을 지키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큰 정의’를 어떻게 내팽개쳤는지, 최고재판소가 사법부를 비판하는 성향의 청법회(靑法會) 소속 재판관들과 국가에 패소판결을 내린 재판관들에게 어떻게 인사 불이익을 주었는지 구체적인 폭로가 가득하다. 당시 그 책을 읽으며 “설마 이 정도까지” 했는데 믿기 어려웠던 일본의 현실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일이 우리 사법부에서도 일어난 셈이다.

법원행정처의 공식적인 사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여전히 시끄러운 모양이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사법부이지만 법원 밖에 있는 우리 모두 눈을 뜨고 사태 마무리가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 한다. 헌법과 법률과 양심보다 ‘높은 분’의 눈치를 먼저 보는 판사들이 득세한다면 그로 인해 벌어질 참담한 결과는 고스란히 재판받는 우리들 몫이 될 것이니 말이다.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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