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분권 대통령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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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08   |  발행일 2017-05-08 제31면   |  수정 2017-05-08
[월요칼럼] 분권 대통령
허석윤 논설위원

필자는 첫 투표를 군대에서 했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였다. 철책을 지키는 최전방 부대에 있던 터라 당시엔 그 투표가 6·10 항쟁과 6·29 선언의 산물인 줄도 몰랐다. 후보는 기호 1번인 여당의 노태우와 야당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었다. 하지만 투표는 황당했다. 전 부대원에게 무조건 1번을 찍어야 한다는 사전 ‘지령’이 내려졌다. 그마저도 못 미더웠던지 중대 인사계(주임상사)가 기표소 안에까지 들어와 누구를 찍는지 감시했다. 그 결과는 100% 투표에 100% 1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투표 후에 흉흉한 소문도 나돌았다. 인근 부대에서 한 병사가 DJ를 찍어 보안대에 끌려갔다는 말이 있었는데,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당시 다른 부대에서도 이런 일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것 같다. 지나간 일이지만 당시 군대에서의 이 같은 부정 선거는 6월 민주 항쟁을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한 원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 여러 음험한 방법을 동원했을 터이지만, 그 전에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것은 그나마 공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 6공화국의 출발이 사실상 군정(軍政)의 연장이라는 오점을 남겼으며 제왕적 대통령제도 계승됐다. 군정 종식을 외치며 집권한 YS도 30년 군부 독재를 지탱해온 무소불위의 대통령 권력만큼은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 이후 대부분의 대통령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마도 이미 보장된 절대 권력을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폐해와 부작용은 심각했다. 견제장치 없는 독재 권력은 부패했으며, 주변에는 호가호위하며 사욕을 채우는 무리가 들끓었다. 대통령 가족이나 친인척, 측근 비리도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느 정권 할 것 없이 시작은 장대했으나 끝은 초라하다 못해 만신창이가 됐다. 생각해보면 역대 대통령 중에 온전히 임기를 마치거나 퇴임 후에 무탈하게 지낸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지만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와 한참 동떨어진 현대판 제왕제가 낳은 필연에 가깝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애초부터 그릇에 비해 과분한 권력을 쥔 것부터가 문제였다. 권력에 대한 욕심만 컸지, 정작 국가 지도자로서의 능력과 도덕성은 낙제점이 아니었던가. 그가 선거의 여왕 정도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진짜 여왕처럼 되면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돼버렸다. 그는 국민에게 큰 상처를 주고 쫓겨났으나,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한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제왕적 대통령 시대를 마감할 계기를 제공했다.

예상대로 이번 대선에서 제왕적 대통령제가 화두가 되고 있다. 주요 후보들도 하나같이 대통령 권력 분산에 나서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문재인 후보는 대통령의 모든 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정부청사로 옮기겠다고 했다. 안철수 후보는 민정수석실을 없애는 등 청와대 기능을 축소하고 나아가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까지 폐지하겠다고 했다. 또 홍준표·유승민·심상정 후보도 이원집정부제, 국무총리 권한보장, 내각책임제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대통령 권력과 관련해 후보들이 내놓은 약속들 중 일부라도 제대로 지켜진다면, 최소한 제2의 박근혜는 나오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낡아빠진 국가권력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변화와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를 허물어 분권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중앙일극주의에 매몰돼 지방이 식민지 상태로 남아 있어선 안 된다. 세계 최악의 수도권 공화국에서 벗어나려면 지방분권 외에는 답이 없다. 이번 대선에서 유력 후보들이 지방분권 의지를 드러낸 것은 다행이지만, 온전한 지방자치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다. 내일이면 새 대통령이 탄생한다. 그가 ‘분권의 미학’을 실천해 통합과 상생의 시대를 열어주기를 희망한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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