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우리 시대의 묘비명

  • 윈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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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15   |  발행일 2017-05-15 제31면   |  수정 2017-05-15
[월요칼럼] 우리 시대의 묘비명
원도혁 논설위원

1970년대 말~80년대 초반 대학생 시절, 우울해질 때 음악은 위안이었다. 야외 전축용 레코드판을 사 모으다가 당시 파격적이었던 킹 크림슨 밴드를 알게 됐다. 1969년 발표된 대표곡 ‘에피탑(Epitaph; 墓碑銘)’은 암울하고 난해한 가사 내용과 특이한 리듬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데모와 휴교로 혼란스럽고 암울하던 시기에 알려진 이 ‘묘비명’은 곧바로 대학가를 접수했다. 대학 1학년 때 영문잡지 ‘타임’에 실린 ‘70년대의 묘비명’이라는 특집기사를 끙끙대며 번역하던 기억이 새롭다.

묘비명은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생전의 업적과 관련된 내용을 비문에 새긴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은 영국의 극작가·소설가·비평가인 버나드 쇼의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이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재치가 돋보이는 명문이다. ‘괜히 왔다 간다’(걸레 스님 중광)나, ‘아르헨티나 국민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에바 페론), ‘최상의 것은 앞으로 올 것이다’(프랭크 시나트라),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스탕달), ‘후세 사람들이여,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노스트라다무스) 등 풍자와 위트, 철학이 담긴 묘비명들도 더러 회자(膾炙)된다. 묘비명은 잠시라도 떠올리기 싫은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현재의 삶을 반추(反芻)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 번뿐인 인생, 어떻게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 것인가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죽은 뒤 내 묘지의 비석에는 과연 어떤 글이 새겨져야 마땅한가 하는 자문도 해보게 된다. 개그우먼 김미화는 미리 준비한 묘비명을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재기는 있으나 의미심장하지는 않다.

혼돈의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지혜나 수신제가(修身齊家)에 관한 조언은 선각자를 통해 접할 수 있다. 경주최씨 가문의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인 육훈(六訓)과 자신을 지키는 지침인 육연(六然)은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육훈 중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나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부자의 사회적 책임과 품격을 잘 반영하는 가르침이다. 억대의 돈을 대학 사물함에 넣어두거나 마늘밭에 파묻고 있는 이 시대의 졸부들이 새겨야 할 금과옥조(金科玉條)다.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고,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성공했을 때 담담하게, 실의에 빠져도 태연히 행동하라는 육연도 훌륭하다.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고, 12대 300년 동안 해마다 만석의 벼를 거둬들인 만석꾼 집안다운 지침들이다. 품격있는 가치관과 지혜는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어록에서도 묻어나온다.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마라’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마라’ ‘수입의 1%는 책을 사는 데 투자하라’ 등이 폐부를 찌른다.

인공지능(AI)이 바둑고수를 물리치고, 의료진료를 완벽하게 해내는 이 최첨단 시대, 우울해지는 시간이 많아지는 건 왜일까. 기계문명, 물질문명이 극단적으로 발전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이 급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했던가. 스마트폰이나 로봇이 지배하는 이 첨단 시대는 반대급부로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인간성은 갈수록 메말라 가고, 외면당하고 있는 전통적인 미덕이나 가치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가치관의 혼란과 혼돈 속에 불거지고 있는 문명의 민망한 증상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개인주의는 극에 달해 있다. ‘조물주 밑에 건물주 있다’는 말은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데 대한 비아냥이다. 혼자서만 즐기는 ‘나홀로족’,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온통 스마트폰에 빠져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구리족’들도 이 첨단 시대의 우울한 표상이다. 커피공화국이요, 술집·음식점 천국인 ‘재미있는 지옥’ 대한민국에서 혼돈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어떤 묘비명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에피탑의 노래 가사처럼 ‘혼란’이 나의 묘비명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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